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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달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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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혜영 Mar 20. 2017

R의 그림

달의 일상

R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두 달쯤 지났을 때였다. 

담임선생님이  또래에 비해 많이 뒤쳐진다며 그림 수업을 권했다.

솜씨가 없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좋지 않은 평가를 받으니

겁이 덜컥 나 당장 미술 수업을 받게 했다.      


다행히 R은 미술 수업을 좋아했다. 

친구들이 놀자고 해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R의 그림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4년이 지나도 R의 그림엔

큰 머리통과 가는 팔다리를 지닌 졸라맨만 등장했고

배경으로 그린 건물은 당장 무너질 것처럼 허술하고 엉성했다.     


예술은 타고 나는 거라 생각해 많이 기대하지 않았지만

영 늘지 않는 모습에 나는 조금 슬펐다. 

R에게 그림 그만두고 다른 거 배워 볼까? 

하고 몇 번 물어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R은 고개를 저으며 그림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나는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그림을 그리며

혼자 즐거워하는 R의 모습이 이상했다. 

조금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그림 수업을 그만둔 뒤에도

R은 계속 그림을 그렸다.

공부하다 답답할 때 할 일이 없어 무료할 때

R은 말없이 노트를 꺼내 슥슥 뭔가를 끄적였다.     


어제,

8년의 시간이 덧칠된 그의 노트를 우연히 보았다.

이제 노트 안에서 졸라맨은 사라졌다.

대신 그곳엔 R이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다.     

함께 보며 울었던 영화,

배를 움켜쥐며 웃었던 만화,

그리고 R이 사랑하는 사람들..     


그것은 누구도 아닌 R의 그림이었다.
그가 지나 온 시간의 흔적이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무색무취에 덧없이 흐르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R의 그림처럼 저절로 자라게 하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그저 기다리기만 해도 예상치 못한 선물을 주는 시간의 위대함.

그것이 바로 우리를 버티게 하는 근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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