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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달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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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혜영 Mar 26. 2017

K를 만나다

달의 일상 - 베트남 여행

여행 준비 중에 글을 쓰는 이유를 묻는 원고를 청탁 받았다.

출발 전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일주일이었다.

원고마감 이틀 전에 돌아오는 나는 다소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며칠을 끙끙대다 원고를 여행 뒤로 미루기로 했다. 백지 상태로 떠나는 여행길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다만,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백지상태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가방을 꾸리는 내 손을 더디게 했다.     



<하롱베이>




비릿한 느억맘 냄새가 가득한 하롱베이 해변에서 K를 만났다.      


느닷없이 퍼붓는 스콜을 피하기 위해 논을 머리에 쓰고 함께 배를 탔다. 소주잔이 몇 차례 돈 뒤, K는 용이 입에서 보석과 구슬을 내뿜어 삼천 개의 섬을 만들었다는 하롱베이의 전설을 이야기했다. 취하지 않았는데, 실소가 번졌다. 내가 떠나온 곳의 이야기와 너무 닮았다.     


용머리, 여의주, 바다 위 아름다운 초록섬.

멀리 돌아 나왔다 여겼는데, 결국은 같은 곳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웃게 만들었다. 희멀건 종유석으로 뒤덮인 동굴 벽을 더듬어 내려가는 내 발걸음이 취한 듯 휘청거렸다.



<천궁동굴>





동굴을 나와 비루한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냉장고 없는 정육점에서 내장을 드러낸 돼지가 육중한 칼날 아래 도막났다. 무더운 열기로 이내 눅눅해진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코를 막고 재빨리 나오는데, 그 옆에서 목욕탕 의자에 걸터앉아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무심히 마주치는 검은 눈동자들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누구냐? 지금 이곳에서 뭘 하는가?’     

“나는 작가다.” 라고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굵은 음성이 목 안에서 들려왔다.

“네가 작가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니?”

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넷째 날 아침, K가 지도를 꺼냈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크게 확대한 지도에서 K는 붉게 칠해진 점 하나를 검지로 가리켰다.

“네가 4일 동안 여행한 하롱베이야. 너는 지난 4일 내내 붉은 점 하나를 보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다닌 거야.”     

K는 베트남에서 6년 동안 본 달랏의 구름카페, 무이 네 사막 끝 신기루, 새벽안개가 방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사파, 삶의 한계를 떠올리는 구찌 땅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며칠을 머물렀다고 그곳을 안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돼. 네가 본 건, 그 붉은 점 하나에 불과하니까.”     

그 때, 문득 다시 그곳에 가게될 거란 생각을 했다. K가 밟았던 무이 네 사막을 지나 달랏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베트콩 땅굴에서 머리를 쑥 내밀어 세상을 내다보고 싶었다.


헤어지는 날, K는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그리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아름답지도 않아서 다시 올 일은 없겠지만, 행여 이 곳의 이름을 듣게 되거나 들르게 된다면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와 추억, 이 곳에 서 있는 나를 기억해 줘요.”

서둘러 공항 로비를 빠져 나가는 그를 뒤로 하고, 다음 만남의 기약 없이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K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를 생각했다.

나는 긴 여행을 하는 중이다. 매일 발이 퉁퉁 부울 정도로 열심히 기웃거리지만, 여태 내가 걸은 길은 지도상의 붉은 점 하나 만큼도 되지 못한다.


내가 평생 걸은 길이 그러한대, 잠시 만난 이들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궤적이 쌓일수록 만남은 짧아지고 이별이 길어진다. 공허한 바람이 깊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계속 화려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글을 쓸 것이다.

먼 훗날 여행길에서 만난 누군가 내 흔적을 보고 같은 꿈을 꿀 지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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