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줄리아처럼 살기

이제서야 본 <줄리 앤 줄리아>

by 양지

고대하던 2주간의 한국 방문이 끝나고 샬럿 집으로 돌아오는 기내에 누워 여러 생각이 들고 났다. 어서 드러눕고 싶은 곳이 미국에 있다는 게 묘했고, 동시에 이제 한국으로 복귀할 날이 8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도 함께 밀려왔다.


돌아가서 해야 할 아이들 새 학기 준비나 샬럿에서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다 졸음이 밀려왔다. 기내 영화 리스트 둘러보다가 눈에 들어온 건 바로 <줄리 앤 줄리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친구들이 오래전부터 나에게 꼭 보라고 추천했던 작품이었다. 내가 무조건 좋아할 거라고, 내게 너무 잘 어울릴 거라고 말했던 영화. 이상하게도 계속 타이밍이 맞지 않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긴 여행을 마치고 노곤한 몸을 누인 비행기 안에서, 친구들의 예언처럼 나는 줄리아 차일드에게 반해버렸다.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프랑스 생활을 시작한 줄리아는 유쾌하고, 따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30대 중반, 188cm 장신의 미국 여성이다. 그녀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1950년대에 남학생들뿐인 프랑스 ‘르 꼬르동 블루’ 요리학교에 입학해 프랑스 요리를 배우게 된다. 입학 과정도 쉽지 않았고 견제도 있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요리했다. 긴 팔로 고기를 호쾌하게 썰며 “이건 정말 재미있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호기심과 기쁨을 숨기지 않는 그 순수함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075529.jpg 영화 《줄리 & 줄리아 (Julie & Julia, 2009)》 ⓒ Columbia Pictures


후에는 TV 요리 프로그램도 진행하게 되는데, 방송 중 오믈렛을 뒤집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는 장면에서 그녀는 놀라지도, 머뭇거리지도 않고 오믈렛을 주워 다시 팬에 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If you’re alone in the kitchen, who’s going to see?”

“You must have the courage of your convictions.”


믿는 데로 행동할 용기를 가지라며 땅에 떨어진 오믈렛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 담는 게 정말 엉뚱하고 웃긴 장면이었는데, 내게는 이상하게 먹먹하고 짠한 위로가 되었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그 일을 좋아한다면 계속해도 된다고, 계속하면 된다고 줄리아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요리책을 집필하던 중, 기여도가 적었던 친구가 이혼 위기에 처하자 마음을 돌려 자신과 똑같은 인세 지분을 나눠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수년간 성실하게 준비해 온 책의 출판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줄리아는 자신의 책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았고,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아 결국 끝내 출간에 성공하게 된다.




미국에 온 후, 내 오랜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 클라리넷 독학을 시작했다. 소중한 사람의 생일에 연주를 선물하는 상상도 좋았지만, 다양한 악기들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연주의 순간을 벅찬 기분을 생각하면 더없이 설레었다. 틈틈이 연습한 끝에 지난달부터 중급자용 교재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이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복식호흡과 계속되는 삑사리로 답답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바빠서 엄두도 못 내던 운동도, 이렇게 하루를 기록하는 일에도 조금씩 시들해졌다.


그런데 줄리아가 내 손을 꼭 잡고 눈을 반짝이면서 말해준다 - 인생이 정말 신나고 재미있지 않냐고, 어서 다시 시작하자고.

줄리아의 오믈렛처럼 또는 요리책처럼, 잠시 인생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고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에도 다시 마음을 들어 올리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기며 계속해 나간다면, 그 과정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 있는 결실로 존중받게 될 것이고, 함께했기 때문에 그 일와 우리들을 더 깊고 넓게 확장시켜 줄 것이라고.

영화 《줄리 & 줄리아 (Julie & Julia, 2009)》 ⓒ Columbia Pictures

줄리아 곁에는 폴이라는 남편이 있다. 줄리아가 기쁠 때도, 좌절할 때도, 도전을 앞두었을 때도 언제나 애정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따뜻한 사람. 하고 싶은 게 많아서 고민인 나에게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아서 불안하다면서도 (하하하) 뭐든 다 하라고 괜찮다고 용기를 주는 남편이 있다. 내 기쁨과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폴을 보며 새삼 남편에 대한 감사가 떠올랐다.


가끔 내 나이를 실감할 때 놀라곤 한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남편과 거울 속 나도 하루하루 미세하게 늙어간다. 나는 변했을까? 변하지 않았을까?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아직 (정말) 많고, 아직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세상에 태어나 받은 것들을 갚을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지 말자. 줄리아처럼 유쾌하게, 즐겁게, 따뜻하게 살고 싶다.


다시, 줄리아처럼.




* 글을 쓰면서 실존 인물인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 1912~2004)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 영화, 드라마와 그녀가 수십 년간 진행한 요리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단순한 요리사나 방송인이 아닌 ‘가정 요리 문화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로 평가받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고. 내가 좋아했던 영화 속 장면처럼 요리 실수도 숨기지 않고 웃으며 넘기는 ‘친근한 전문가’ 이미지로, 실제 50대 초반에 TV에 데뷔해 여성들에게 ‘나이 들어도 새 도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줄리도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였는데, 언급조차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 메릴 스트립은 2010년에 이 영화로 그녀의 6번째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뮤지컬/코미디 부문). 반전은 그 다음해엔 <철의 여인>으로, 그 전해엔 <맘마미아>로, 3년 전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 연달아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점. 다 다른 사람같은데 다 한사람인 진정한 천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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