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제색도 앞에서
눈을 감아도 훤히 볼 수 있는 인왕산이지만 비가 내린 후 하늘이 갠 어느 날 눈앞에 보인 인왕산이 어떤 영감을 주었길래 이런 명작을 남기게 됐을까? 겸재 정선은 인왕산 골짜기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다. 산의 실루엣은 물론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섬세한 굴곡까지 눈을 감아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각인된 인왕산이었을 텐데, 이날의 풍경은 도대체 어떤 장면이었길래 정선은 붓을 들게 되었을까?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매일 보던 풍경도 새로운 모습으로 보일 때가. 오히려 그곳을 너무나 잘 알기에 조금만 모습이 달라지면 바로 알아채고 새로운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릴 때 만화책을 읽으면 한 번 읽고 끝내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어 나가면 주위에선 똑같은 내용일 텐데 다 아는 이야기를 왜 자꾸 읽느냐고 물어봤다. 나는 만화책을 처음 읽을 때는 내용이 너무 궁금해 빠르게 읽고 나간다. 거의 그림과 대충의 문맥만 파악해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한다. 다음에 읽을 때는 좀 더 차분히 집중해서 읽는다. 그러면 놓쳤던 대사와 깨알 같은 그림이 보이면서 또 다른 재미를 찾게 되었다.
그림을 마주한 순간 국보가 갖고 있는 무게감에 괜스레 그림에 후광이 느껴진다. 나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그림을 봤다. 가까이에서도 보고 멀리 떨어져서도 보고 자리에 앉아서 꽤 긴 시간 가만히 그림을 봤다. 어두운 박물관 전시실에 앉아 뚫어져라 그림을 보고 있던 나는 점점 인왕산 자락으로 옮겨졌다. 1751년의 그곳으로. 안개가 끼고 도는 인왕산 공기의 촉감과 냄새와 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는 인왕제색도 앞에서 그림이 주는 힘을 처음으로 느꼈다.
박물관을 나와 햇빛을 마주하니 어딘가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생소하고 이상한 감정이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방금 돌아온 듯한 기분이다. 울림이 멈추지 않아 박물관 주차장에 서서 다시 들어갈까? 하는 고민을 했지만, 곧 이 감정 그대로 추스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평소 한라산을 자주 다닌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상징적인 한라산에 마음만 먹으면 오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마음먹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나는 한라산에서 많은 것을 얻는다. 풍경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영감일 수도 있다. 워낙 자주 다녀 이제는 탐방로 구간에 맞춰 페이스 조절을 쉽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이곳을 소개하는 가이드 투어를 운영하면서 내가 한라산에서 얻는 것을 여행자도 모두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과연 내 가이드를 통해 여행자가 나랑 똑같이 느끼고 감동할까 하는 의문점이 있었는데, 소중한 국보 제216호를 통해 나는 힌트를 발견했다. 이야기의 순간이 생생해야 한다. 내가 겸재 정선이 그림을 그렸던 그때로 다녀왔듯이.
전시가 끝나기 전까지 한라산만큼 인왕산에 자주 다녀가야겠다.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어느 수집가의 초대’가 전시 중입니다. 고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 2만 1천여 점 중 엄선한 대표 문화유산 360여 점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8월 18일까지 이어집니다. 전시 유산 중 대한민국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는 6월 30일까지 이곳에서 전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