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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구간에 이사갑니다

by 우주가이드

신구간

IMG_9876.jpg 사진. 제주도립미술관, 제주작가마씀 <고영만이 걸어온 길>


제주 섬에는 1만 8천 신이 있습니다. 마을마다, 집마다 좌정한 신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며 제주 도민의 일상에 깊게 들어와 있습니다. 옛 제주에서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엔 항상 올레를 지나칩니다. 집 앞 올레목에는 대문 역할의 정낭이 있었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안거리, 밖거리, 정지, 고팡, 통시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장소에 신들이 좌정해 있습니다. 정주목(정낭을 걸쳐 놓을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양쪽으로 세운 기둥)에 주목지신, 정낭에 정살지신, 집에는 성주, 상방의 대문신인 문전, 부엌의 신 조왕, 고팡을 지키는 안칠성, 집안의 부를 수호하는 신 밧칠성, 화장실의 신 칙도부인, 돌담의 신 내담지신, 집터를 방위별로 지키는 오방토신. 제주도에 온다면 어디에서나 신이 만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신들의 섬 제주입니다.


모든 신에게는 정성을 다합니다. 제주 도민들은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화를 입는다고 믿었습니다. 반대로 정성을 다하면 지켜 준다고 믿었죠. 계절마다 날마다 특별히 굿을 하는 날 뿐 아니라 평소에도 신이 노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조심했습니다. 집 곳곳에 신이 자리 잡고 있으니 특히나 집을 옮기는 일은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제주에 있는 1만 8천 신은 평생 하나의 일만 하지 않습니다. 인간 세계에 내려와 1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하고 신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그동안의 일을 옥황상제에게 보고하고,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섬에서 새롭게 할 일을 부여받은 신들은 다시 내려옵니다. 구 신과 새 신이 교대하는 시기, 제주 사람들이 ‘신구간’이라고 부르는 그때입니다.


‘신구세관교승기간(新舊歲官交承期間)’을 줄여 신구간이라고 불렀습니다. 집, 마을, 산, 바다, 목축, 농경, 제주의 모든 것을 관장해 오던 1만 8천 신들이 임무를 교대하는 기간입니다. 우리나라의 이십사절기 중 가장 마지막 절기인 대한 후 5일째 되는 날부터 첫 번째 절기인 입춘 전 3일까지가 신구간입니다. 신이 교대하는 기간에는 집안 어디에도 신이 없어 이제서야 비로소 이사를 할 수 있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신구간에 이사하는 세시 풍속을 오랜 세월 지켜왔습니다. 이사를 하지 않더라도 집을 수리 하거나, 집을 지켜줄 신이 없는 신구간 동안 문단속을 철저하게 했던 풍습도 남아 있습니다.


신구간에 이사를 가는 풍습은 무속 신앙으로부터 전해져오는 미신인 것 같지만 꽤 합리적인 행위였습니다. 농경사회였던 시대적 배경과 따뜻한 제주의 기후가 신구간이라는 풍습을 만들게 됩니다. 신구간 시기는 농한기에 해당합니다. 이제 막 새로운 일 년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죠. 아직은 일손이 한가할 때 집수리도 하고 이사도 하여야 바쁜 농사철에 농사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봄이 오기 전 세균번식이 되지 않는 낮은 기온이 유지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신구간에 이사하거나 집이나 변소를 개량해야 세균감염 등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농경이 중심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은 신구간 이사 풍습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입춘굿

IMG_0439.jpg 사진.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관덕정과 제주성안 600년> 중 1914년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입춘굿 재현행사


신구간이 끝나면 곧 입춘이 돌아옵니다. 입춘은 새철드는 날입니다. 입춘은 새로운 농사 시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한 해의 농사를 위해 가장 정성을 드렸던 날입니다. 새해 첫 번째 절기인 입춘을 맞아 여러 지방에는 농경의례와 관련된 행사가 열립니다. 김해의 춘경제,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나경, 강원도 삼척의 입춘 제 등이 대표적입니다. 제주에서도 민관이 함께 입춘굿을 성대히 열었습니다. 제주도 입춘굿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탐라국 시대부터 조선 말까지 오랜 시간 이어졌다는 것과 심방(무당을 일컫는 제주어)들이 치르는 무속 굿을 중심으로 의례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의해 맥이 끊어졌던 제주의 입춘굿은 1999년 제주시와 한국민속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가 공동으로 복원하며 지금까지 도시 축제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때 제주의 민속학자인 문무병 박사의 역할이 컸습니다. 올해도 입춘에는 관덕정 광장과 제주목관아에서는 굿 놀이가 펼쳐집니다. 2일 거리굿으로 시작해 3일에 열림굿, 4일에 입춘굿으로 이어지는 이번 굿판에는 특히 4일에 오전 10시 초감제를 시작으로 자청비 놀이, 세경놀이, 입춘굿 놀이 등 풍요를 기원하는 다양한 굿 놀이가 열립니다.


입춘굿 소식은 곧 따뜻한 봄이 온다는 것입니다. 봄을 맞이할 때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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