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주 개인전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과장의 이야기 - 아빠 왔다>
조선시대 제주목 관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제주읍성 안 마을을 요즘에는 ‘원도심’이라 부르며, 곳곳에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용도를 다한 건물들은 찬란했던 과거의 추억만 남긴 채 도시의 흉물이 됐습니다. 그 크기는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갔는지 알려주는 흔적입니다. 큰 건물은 생명을 다하면, 다시 숨결을 채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수도 있죠.
2000년대 초반까지 호황을 맞던 제주시 원도심 지역은 새로운 도시가 개발되면서 사람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올드하고 불편한 도시에서 편한 도시로 사람과 콘텐츠와 돈이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도시는 점차 활력을 잃어 갔습니다. 완전히 사라질 것 같던 도시에 언젠가 진한 색이 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캄캄한 도시를 밝힌 빨강은 조금씩 도시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제주시 원도심 지역에는 외벽이 빨갛게 칠해진 커다란 건물 세 개가 있습니다. 모두 아라리오 뮤지엄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탑동시네마>, <동문모텔 1>, <동문모텔 2>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극장, 모텔이 뮤지엄이 됐습니다. 쓰임을 다한 건물에 새로운 이야기를 담은 세 개의 공간은 제주시 원도심 재생의 시작이었습니다.
세 개의 아라리오 뮤지엄은 오랜 시간 공간이 담아 왔던 이야기와 현대 미술의 생생함이 공존합니다. 극장이었던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는 영사실에서 예술 영화를 상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모텔이었던 곳에서는 하루 일을 마치고, 바닥에 누워 비로소 숨을 돌리던 청년의 이야기가 작품에 투영되어 감정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중에서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2 공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2는 자투리땅에 지었던 대진여관을 탈바꿈하였습니다. 새로운 용도로 바꾸면서 흔적을 여전히 남겨 놓은 것도 매력적이지만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구본주 작가 때문입니다.
“21세기를 빛낼 조각계의 떠오르는 별”, “작가들의 작가”로 불렸던 구본주 작가는 2003년 9월 29일 새벽 5시께 경기도 포천에서 길을 걷다 자동차에 치여 숨졌습니다. 그의 나이 37살이었습니다.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2에서는 구본주 개인전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과장의 이야기 - 아빠 왔다 I’m home> 이 2017년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구본주 작가의 대표작 40여 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품의 변화를 보며 그때그때 작가가 집중했던 세상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생기고, 부모님은 나이가 들어갈 때 마주한 구본주 작가의 조각은 감정을 흔들었습니다.
좁은 계단을 올라 뮤지엄 5층에 이르면 <이과장의 40번째 생일날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허공에 매달려 과장된 몸짓으로 어딘가 달려가는 모습의 조각입니다. 처음 이 작품을 만났을 때 제목이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40번째 생일은 지났지만, ‘40번째 생일에 내 아들에게 무슨 얘길 들려줬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아들의 눈에도 아빠의 모습이 이과장의 몸짓처럼 보일까?’
목을 길게 빼고, 어금니는 꽉 깨물고, 손끝까지 힘을 주며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잡기 위에 달리는 모습. 가방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잡이만 잡고 열심히 달리는 모습. 멀끔한 정장을 입었지만, 구겨질 대로 구겨져 더 이상 멀끔하지 않은 모습. 조각이 보여주는 장면에 정확히 나 자신이 투영되었고, 우리 아들에게 이 모습으로 보이긴 싫었습니다. 아들에게는 멋진 자세로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는 아빠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샐러리맨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은 대체로 과장되고, 해학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힘든 현실이지만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웃음을 남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나의 모습을, 때론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결국 가족이 떠오르는 경험입니다. 좀 더 이전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강한 반항과 힘의 표현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움직입니다.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2에서는 구본주 작가의 유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1,000명의 샐러리맨 하늘을 달립니다. 구본주 작가는 이 작품을 구상하고, 2개의 샐러리맨 조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머지 998개는 배우자인 전미영 작가와 동료 작가, 후배 작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별이 되다>를 완성했습니다. 몽환적인 공간에서 한 명, 한 명이 각자 애쓰며 하늘을 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리는 모습은 마치 우리의 모습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