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벙커 도슨트
2018년 개관한 빛의 벙커는 저에게 미술의 접근성을 높여주었습니다. 압도적으로 큰 화면을 통해 보이는 작품은 배경 음악에 맞춰 전환되며 완벽한 몰입을 선사했습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미술이 훨씬 재밌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빛의 벙커에서는 개관 이후 구스타프 클림트, 빈센트 반 고흐, 모네, 르누아르, 세잔, 샤갈의 전시가 있었고, 현재 ‘추상 회화의 오디세이’라는 주제로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이 전시 중입니다. 추상회화의 창시자라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는 대상의 현실적 재현을 거부하고 색채와 형태, 선의 리듬을 통해 내면의 정신성을 표현하였습니다. 독일 표현주의 그룹 '청기사파'를 이끌고 근대 독일의 예술 교육기관인 바우하우스에서 조형 이론을 정립하였습니다. 초기 자유로운 서정적 추상에서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으로 나아가는 독보적 행적을 남겼는데, 특히 음악적 울림을 시각화한 그의 시도는 현대 추상미술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미술에 깊은 지식이 없는 방구석 관람객에게는 추상화는 특히 어려운 분야입니다. 눈앞에 그림을 보며 잘 그렸는지, 뭘 그렸는지, 왜 그렸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경험에서 짙은 안개가 낀 평화로*를 운전할 때 느꼈던 답답함을 떠올립니다.
* 평화로는 평소에 안개가 자주 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도움입니다. 입구의 설명을 차근히 읽고, 팸플릿의 설명을 읽어봅니다. 이것으로도 칸딘스키의 그림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도슨트와 함께하길 추천합니다. 빛의 벙커에서는 혼자서 관람할 수도 있지만, 도슨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 더 깊이 있는 몰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박유라 도슨트님의 시간을 선택했습니다. ‘프라이빗 도슨트’란 상품으로 예약할 수 있는데, 전시 관람과 도슨트, 그리고 벙커 옆 커피박물관 Baum에서 음료 1잔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라이빗 도슨트는 커피박물관 Baum에서 음료와 함께 사전 해설로 시작합니다. 방해받지 않는 우리만의 공간에서 20분 정도 이번 전시 작가와 작품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조금은 추상화에 대해 알 것 같고, 칸딘스키의 작품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해상도*가 올라가는 순간이었습니다.
* 유병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작가의 ‘인생의 해상도’를 읽고 나서 ‘해상도’라는 표현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워밍업을 마치고 벙커 안으로 들어갑니다. 빛의 벙커는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언제나 벅찬 감정이 밀려옵니다. 웅장함 속 몰입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고 작품에 집중해 봅니다. 사전 해설에서 깊고,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작가와 작품을 이해했다면 벙커 안에서는 마치 오디오북을 듣는 거같이 편안한 해설이 이어집니다. 해설은 무선 송수신기를 통해 들을 수 있어 벙커 안을 마음껏 누리며 들을 수 있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눈 앞에 펼쳐지는 작품 설명이 실시간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는 작품 하나하나 깊게 파고든다기보다 감상 포인트를 친절히 안내하는 해설입니다. 벙커에서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깨어날 때 짜릿함을 잊지 못해 중간중간 이어폰을 빼보기도 합니다.
현재 빛의 벙커의 전시는 장민승, 칸딘스키, 파울 클레, 세 명의 메인 전시와 모스플라이, 김재이 작가의 인터루드 쇼가 전시되는데, 개인적으로 장민승 작가의 ‘서귀-수취인불명’ 작품에 큰 울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주를 무대로 여행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저에게 장민승 작가의 작품은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도움이 필요합니다. 깜깜한 길을 안내하는 빛은 안도와 편안을 주기도 하지만 그 길에 무엇이 있었는지 발견할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새로운 발견은 재미를 가져옵니다. 빛의 벙커에서 기회를 잡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