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와 사랑의 분리

나는 사랑인 줄 알았네

by 양유정

"우리 섹파 맞지?"


S가 남자친구(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들었던 말이다고 한다. 평소에 연락도 잘 안 되고 만나면 모텔에 데려가기 바빴다더니, 결국 이 사달이 났구나.


S와 '그놈'은 강남의 어느 바에서 만난 사이다. 그놈이 S의 번호를 딴 것이다. S는 스물다섯, 그놈은 서른셋. 나이 차이만큼이나 그놈은 정말 여자를 잘 알았다. 섬세하고 따뜻했다. 사귀자는 말은 안 했지만 그놈은 애인이 아니면 하기 힘든 행동을 했고, S는 그 행동을 허락함과 동시에 둘의 연애가 시작됐다고 믿었다. S가 순진했다. 그녀는 '30대의 연애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시작되는구나' 하며, 그놈의 능숙한 다정함을 사랑하고야 만 것이다.


사귀자는 말 없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S의 말에, 나 또한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연애하는데 꼭 사귀자는 말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놈의 목적은 딴 데 있었다. 만나기만 하면 성관계를 하려고 했다는 게 결정적인 증거다. 데이트하는 날엔 늘 모텔이 예약되어 있었고, 차 안팎에서 무리한 성적 요구를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도 딱 그때뿐. S가 하기 싫다고 하면 더 오기가 생긴다던 그놈은, 성욕을 채우기 위해 S의 사랑을 이용하는 게 분명했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S의 머리채를 잡아서라도 당장 관두게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놈은 마음을 내어줄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우며 더 철저하게 S를 잡아두었고, S의 사랑은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더 깊어졌기 때문이다. S가 그놈의 눈치를 보며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그녀의 자존감은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그놈이 원하는 건 너와의 사랑이 아니라 네 몸뿐인 것 같다는 말을, 나는 차마 S에게 전하지 못했다. 그렇게 위태롭게 4개월이 흘렀다.


그래서 '우리 섹파 맞냐'는 질문에 S가 뭐라고 대답했냐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니라고 하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해지니까. 그렇다고 맞다고 하기엔 그동안 S의 마음이 그게 아니었어서. 반박하려고 돌이켜봤지만 연애라고 우길만 한 증거도 없었다. 그놈의 친구들을 함께 만날 때면,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는 대신 '술집에서 만난 사이'라며 교묘하게 대답을 피했고, 연인처럼 연락을 계속 주고받지도 않았으며, 만나면 늘 당연하다는 듯이 섹스를 했으니까. 그놈의 말이 맞았다. 만날 때마다 섹스를 하는 사이. 그게 섹파가 아니면 뭐야.


아무래도 그놈은 섹스는 하고 싶고, 서로의 마음을 책임져야 하는 깊은 만남은 싫었던 것 모양이다. 사실 한 발자국만 떨어져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놈이 어떤 마음으로 S에게 접근한 건지. 그의 다정한 말투와 손길은 S가 그놈의 성적 요구를 들어줄 때만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랑에 눈이 멀면 그 한 발자국 떨어지는 게 참 어렵다. 어쩌면 그놈이 S를 사랑하지 않는단 사실을 S도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을 택했는지도. 때론 모르는 게 약이고, 현실 자각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싶은 때가 있다. 그렇게 S는 섹스가 사랑이라고 믿으면서 너무 오랫동안 그 관계를 끝내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S는 하루가 다르게 병약해졌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침대 밖에서의 모든 시간은 늘 피가 말랐다고 한다. 그만큼 외롭고, 공허했고,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고. 그런데도 온 신경은 그놈을 향해 곤두서 있고, 사랑받지 못하는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고 했다. 이미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S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침대 밖에서도 사랑받기 위해 더 발버둥 치는 것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랑해서 섹스하는 사람과, 섹스를 위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만나면 다치는 쪽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모두에게 섹스가 사랑의 연장선이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우리는 쾌락만을 위한 가벼운 섹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놈은 쉬운 섹스를 하는 사람 중 하나였고, S는 그 반대의 사람이었다. S에게 섹스는 사랑의 결정체였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 하고만 나눌 수 있는 교감이었고, 사랑 그 자체였다. 그러니 S가 그와의 섹스를 마음먹은 순간은 더 견고한 사랑을 약속한 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놈은 그 예쁜 마음을 보란 듯이 짓밟은 거다.


그래서 이 연애의 결말은? 그놈이 어느 날 갑자기 잠수를 타면서 관계가 끝났다.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위로해줬지만 S에게 남은 것은 허무함, 그리고 아직 다 소진되지 않은 사랑,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이었다. 앞으로 S는 모든 섹스를 의심하게 될 것이고, 그 상처와 기억을 치유하는 데에 아마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섹스와 사랑. 참 혼동하기 쉬운 영역인 것 같다. 섹스할 때만큼은 온 신경이 서로한테 집중되고, 마치 세상에 단 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으니까. S도 그래서 착각한 것일 테고. 나 또한 '사랑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섹스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 둘이 완전히 다른 영역의 존재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모든 섹스를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오류는 기민하게 경계해야 한다. 섹스를 위한 섹스는 딱 거기까지다. 침대 한정적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도 아까운, 딱 그만큼의 감정. 고작 그만한 마음으로 섹스를 하려는 사람에게 속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섹스와 사랑을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앞으로 사랑 없이 섹스를 하라는 건 아니고, 적어도 내가 사랑에 기반한 섹스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단정해선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왕이면 선 연애 후 섹스를 추천해요.) 쾌락만 추구하는 섹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더 이상 예쁜 마음들이 상처 받지 않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PS. 섹스를 위한 섹스(대표적으로 원나잇과 섹파)를 즐기는 분들의 가치관을 존중합니다. 다만 님들끼리 하세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양유정

그림 소우주 (instagram@sowoojo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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