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답을 지우다 보면 정답만 남으려나요
예전에는 친구들에게 연애 상담을 해줄 때 낙관적인 이야기를 해주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헤어지지는 않는 쪽으로.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란 말을 믿는 편이었지만, 나와의 대화 이후 사소하게나마 마음가짐에 변화가 생긴다면 (단기적으로는)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친구가 그 연애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다. 언제 해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 게 이별임을 잘 아니까, 그 시간을 최대한 미루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친구가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을 텐데 기어이 독한 말을 꺼낸다. "그 연애 이미 틀린 것 같은데. 헤어지는 거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아."라고. (글로 써놓으니까 더 독하네...) 세상에 100%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지만, 나는 진열대에 잔뜩 쌓여있는 수많은 사과 중에서 예쁜 사과를 고르듯 신중하게 '틀린 연애'를 골라낸다. 금방 끝날 것 같은 연애, 혹은 더 만나봐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은 연애, 이별이 시간문제인 그런 연애들 말이다.
힘들 게 뻔한 길을 가지 말았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 건가? 내가 열 손가락을 다 합쳐도 모자란 수만큼의 연애를 거치면서 유독 후회한 게 이거라서 그렇다. 처음부터 오래가지 못할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 눈 감고 귀 닫고 시간에 나를 맡겼던 것. 그 대가로 나는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잔인한 밤을 수없이 지새워야 했다. 뭐든 꼼꼼하게 잘 해내는 내가, 왜 연애할 때는 이렇게 쉬운 문제를 틀렸을까. 최악의 미래를 예고하는 그 많은 단서를 왜 지나쳤을까.
대표적으로 P와의 연애가 그렇다. P에게는 학창 시절에 덩치가 큰 교우(친구라는 표현은 안 맞는 것 같아서)에게 폭력을 당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래서 덩치 있는 사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데이트하는 동안 그 트라우마가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하루는 신촌에서 같이 길을 걷다가 덩치 큰 남자와 부딪힐 뻔 한 상황이 연출됐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북적대는 신촌 한복판에서는 흔한 일이었는데,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P는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심한 욕을 했다. 그런가 하면 내 몸무게가 조금 늘면서부터는 슬그머니 다이어트를 제안했다. 살찌기 전 그때가 훨씬 예뻤다면서. P는 마른 사람이 아니면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그의 상처까지 품어줄 만큼 그릇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P를 만나는 동안 나는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잃었고 그의 검은 트라우마가 나까지 집어삼킨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나쁜 연애가 내게 더 많은 상처를 입히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그 관계를 멈출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의 날들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갈등의 골이 한계치를 넘기 전에, 그러니까 P가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그만 먹으라며 내게 창피를 줬던 날, 아니면 내게 살찐 것 같다며 다이어트를 제안했던 날, 아니면 더 이전에 신촌에서 P가 살집 있는 사람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던 날들 말이다.
지독한 결말이 정해져 있는 연애. 잠깐뿐인 설렘에 휘둘려 시작해서는 안 됐던 연애. 온갖 마음 고생은 다 하고 나서 그 연애가 오답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게 황당할 지경이다. 마음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P에게 이별을 고했지만 이미 상처가 깊어져 흉터가 됐을 때였다. 다시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연애라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연애를 시작하기 전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라도, 단 한 번만 P와의 연애를 객관적으로 보았다면 '틀린 연애'가 나를 다 갉아먹을 때까지 방치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 이후로는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도 그 연애가 오답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연애가 나를 병들게 하기 전에 빨리 중지 버튼을 누르고 나를 지켰다. 아직 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나는 정답을 찾고 싶었다. 오답이 있으면 정답도 있을 테니까. 20년이 넘는 시간을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의 세계가 순조로이 합쳐지려면 정말 많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하고, 그러니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서로 상처 입히는 일 없이 굴러가는 연애가 '정답'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운명의 사람은 따로 있다거나, 인연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거나 하는 말도 숱하게 나오는 것일테지.
만약 지금 하고 있는 연애가 어쩐지 스스로를 괴롭게 만든다면 좋아하는 감정은 잠깐 뒤로 하고 한 발자국 떨어져 그 연애를 다시 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를 해치는 줄도 모르고 연애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연애에 희망이 있는지. 잘해보려고 끈질기게 노력해야만 유지되는 연애라면 그 연애는 필연적으로 오답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나는 그 오답을 쏙쏙 골라내어 내 친구들이 더 큰 상처를 받기 전에 멈추도록 할 거다. (프롤로그에서도 말했듯 물론 친구들은 지 하고 싶은 대로 할테지만...^^)
PS. 지금은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P에게 닿지 못할 메시지를 남긴다. 네 트라우마를 극복시켜줄 마음 넓은 여자와 행복한 사랑을 하고 있기를 바라. 나한테 네가 오답이었듯 나도 너한테 오답이었을 테니까 네가 줬던 상처는 잊고 살아갈게.
글 양유정
그림 소우주 (instagram@sowoojo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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