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야 지킬 수 있는 게 사랑인 줄 알았거든요
오늘은 J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J는 스무 살에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인데요. 처음 J를 만났던 날 J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 예뻤거든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는데도 말이에요. 심지어 J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식 없이' 친절했어요. 불순한 욕심이나 숨겨진 의도 따위는 없는, 순도 100% 친절임을 저는 알았습니다. 당연히 저만 느낀 것은 아닐 테죠. 그래서인지 그녀의 주변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주목받을 행동을 하지 않아도 주목하게 되는 아우라를 풍겼달까요.
당연히 J는 인기도 많았습니다. 학교에서, 학교 밖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여행지에서. 어딜 가나 그녀에게 대시하는 남자들이 있었더랬죠. 저는 그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J에게 걸맞은 사람인지 요목조목 따져 묻는 역할을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괜찮은 남자들도 많았습니다. 외모도 훤칠하고 성실하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제 눈에는 항상 J가 아까웠지만, 그래도 J가 좋다고 하면 응원해줄 생각이었는데요. 희한하게 J는 그 모두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외모도 준수하고 착하셔. 살아온 방식이 비슷해서 대화도 잘 통하는 것 같아. 근데 이게 사랑 맞아?"
J는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에휴- 그럼 아닌 거잖아요. 사랑이라면 사랑이 뭔지 모를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연애하면서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니까, 저는 최후의 수단으로 간결하고도 확실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키스 가능?"
"음... 하라고 하면, 눈 딱 감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정말 상대가 원하면 억지로라도 키스할 애라서요. 사랑은 둘째치고 '절대 스킨십은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20대 중반으로 접어들 때까지 J는 사실상 솔로로 지내야 했습니다. '사실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어쩌다 만나게 된 사람이 몇 명 있긴 했는데 전부 얼떨결에 사귀게 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에요. 사귀는 동안 J는 어떻게 헤어지자고 말할지 고민만 했고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사귀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이번엔 진짜 사랑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번의 긴가민가한 인연이 스쳐 지나가고 반쯤 포기했을 무렵,
J에게도 드디어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J가 그렇게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주는 건 처음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더라고요. 카톡보다 편지를 좋아하고, 스마트폰의 카메라보다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고, 유튜브보다 책을 좋아하는, 그런 아날로그 감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J는 처음으로 사람에게 끌린다는 느낌을 알게 됐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첫사랑, 첫 연애. 고대했던 만큼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을까요? J는 연애도 꼭 그녀가 살아온 방식처럼 하더라고요. 순도 100%, 진정성 있게요. 그 흔한 밀당도 안 하고, 좀처럼 싸우는 일도 없고요. J의 남자친구가 데리러 온 걸 본 적이 있었는데, 둘의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렸습니다. 결국 J에게도 사랑이 찾아왔구나, 천생연분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남자친구도 그녀에게 같은 크기의 사랑을 주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J는 그 사람의 좋은 점만 얘기하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엔가부터 J가 무거운 고민을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성관계에 관한 문제였어요. J가 사랑을 아주 천천히 알게 된 것처럼 성 문제에서도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J는 초조해 보였습니다. "전 여자친구와는 이런 문제없었을 텐데. 내가 섹스를 못하겠다고 하면 나를 안 좋아하게 되는 거 아닐까?" 라며 본인보다는 사랑을 걱정했습니다. 두 번째는 물질적인 문제였어요. 3년을 만나는 동안 J는 남자친구에게 제대로 된 선물 한 번 받아본 적 없더라고요. 생일 선물로 남자친구가 어릴 때 쓰던 저금통을 받았고요. (소름...) 그래 놓고 J는 남자친구가 필요하다는 게 있을 때마다 기억해뒀다가 그게 얼마짜리든 월급을 쪼개 꼬박꼬박 선물했다네요. 속물처럼 보일까 봐서 이 문제에 대해 말 한 번 못해 봤대요.
마지막 화룡점정은 이성 문제였습니다. 친한 여동생과 단 둘이 놀이공원에 갔더래요. 셋이서 가려고 했던 건데 한 친구가 못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둘이 간 거라나요.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다가 둘이 손 잡은 것을 나중에 알게 됐지만 J는 화내지 못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바람피운 거잖아. 백 번 천 번 욕해도 모자란데 왜 끙끙 앓고만 있어?"
"절대 이성적인 감정 아니고, 그냥 아끼는 동생이라는데 어떡해... 내가 이해 못 해주겠다 그러면 그냥 이 관계 끝나는 거잖아."
J는 한순간도 그와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매 순간 좋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사랑받으려면 모든 것을 참고 이해해줘야 하는 줄 알았던 거죠. 그리고 그게 연애를 오래도록 지켜줄 거라고 믿었고요. 결국 J의 속은 곪을 대로 곪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 한 채로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무려 3년이나요. 착해 빠진 J가 어디 가서 당하고 살지나 않을까 항상 걱정했는데, 그게 J의 첫사랑으로부터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믿고 싶지 않아도 그 관계는 이미 끝난 거라고, 앞으로 남자친구가 어딜 가든 의심하게 될 거고, 신뢰가 무너진 관계가 얼마나 가겠냐고, 저는 또 잔인한 진실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래도 J는 하루만 더, 한 번만 더, 하면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요.
그러던 어느 날 J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별하고 난 직후에 뭐부터 해야 되냐고 묻더라고요. 결국 남자친구가 먼저 이별 통보를 했대요. J가 그토록 좋아했던 '편지'를 통해서요. 상처는 있는 대로 줘놓고, 만나서 이별할 용기조차 내지 않다니요. J가 좋은 여자친구이고 싶어 노력했던 모든 순간을 무색하게 만드는 짓이란 걸, 그 사람은 정말 몰랐을까요.
역시 시간은 약이라 다행히 지옥 같은 이별의 아픔도 어느덧 J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저는 J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과거의 어느 하루로 돌아가서 뭔가를 바꿀 수 있다면, 어느 날로 돌아가겠느냐고요. J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선을 넘었던 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리고 그만 만나자는 말을 직접 말하고 싶다고요. 연애하면서 한 번도 ‘나를 위한 선택’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적어도 헤어지자는 말은 나 스스로를 위해 내가 꺼내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요. 무조건적으로 좋은 사람이기 위해 노력했던 J의 시간들. 사랑을 지키고 싶어 애썼던 그 시간들이, 되려 사랑에 끌려다니도록 만들었다는 걸 J도 이제 알게 된 거겠죠. 사랑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좋은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 나를 위한 길이란 것도요.
시간이 많이 흘렀고 J는 다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중입니다. 마치 사랑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착하고 말 잘 통하는데, 이 정도면 사랑인가?" 하면서요. 그러면 저는 또 "키스 가능?"이라고 묻고요. 희미한 흉터는 남았겠지만 J의 상처가 잘 아문 것 같아 다행입니다. J가 다음 연애를 할 땐, 그녀의 세상이 사랑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도록 두 발 땅에 잘 딛고 서있으라고 신신당부해야겠습니다.
글 양유정
그림 소우주 (instagram@sowoojo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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