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했어, 다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리는 이별이 있다. 사랑이 식었는데 억지로 관계를 유지하다가 홧김에 저질렀던 이별 통보, 모진 말과 행동으로 마음에 잔뜩 생채기를 냈던 시간들, 예의 없는 방식으로 끝냈던 관계가 그렇다. 세상에 좋은 헤어짐이란 없다지만, 한 때 사랑했던 사람과의 마지막인 만큼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어야 했는데. 내가 했던 '나쁜 이별'들이 마음에 남아 나를 괴롭힌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L과의 이별이다. 그와 2년 가까이 만났을 무렵에 찾아온 권태로움을 난 극복하지 못했다. 사랑이 식어버린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L은 이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서 내게 더 많이 연락하고 신경 써줬는데, 난 그의 노력이 오히려 집착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바쁘단 핑계로 답장도 늦게 하고 전화를 피했다. 쌓여가는 부재중 전화에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내게 친절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왜 이렇게 착한 거야. 내가 헤어지자는 말도 못 하게.'
겨우 이렇게밖에 생각하지 못 했다. 그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똑같이 나를 사랑해준 것뿐인데, 난 헤어지자고 말할 자신도, 그렇다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더 잘해볼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는 어느 날엔가 그에게 짜증을 내다가 충동적으로 헤어지자고 말해버렸다.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배려 없는 언어로 이별했다. 끝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했던 L은 그 길로 뒤돌아서 나를 영영 떠났고, 미안한 마음과 후회 때문에 자꾸자꾸 뒤돌아보게 된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L과의 연애가 아니더라도 내가 했던 이별은 대체로 나빴다. 방식은 다 달랐지만, 헤어져야 할 때 헤어지지 못하고 바닥을 칠 때까지 관계를 방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K에게도, D에게도, P에게도 그랬다. 어차피 이별하는 마당에 어떻게 이별하는지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그동안 나쁜 이별을 합리화하며 살았는데... 예의 없는 이별을 당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동안의 내 이별 방식이 너무도 틀렸다는 걸. 나는 다시 잘해보려고 애쓰고 있는데, 이미 다른 사랑을 시작한 전 남자친구를 봤을 때. 그런 방식의 이별이 예쁜 추억마저 망쳐놓는다는 것과, 남겨진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어슴푸레 존재했던 죄책감이 아주 선명해졌다. 그제야 과거의 나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 거다. 내가 했던 이별이 딱 그런 모양새였으니까.
후회됐지만 그렇다고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되돌릴 방법도 없어서, 그 기억이 희미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뇌되이면서 금방 잊히길 바랐는데, 아직도 난 그들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헤어지던 순간과 그들의 받았을 상처가 선명하게 떠올라서, 그렇게밖에 이별하지 못 한 내가 너무 한심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예쁜 시간들이 그들에겐 최악으로 기억되겠지, 내가 선물한 최악의 이별 때문에. 나 진짜 별로다.'
당시에는 몰랐다. '어려서' 그랬다고 합리화하고 싶지는 않고, '몰라서' 그랬던 건 사실이다. 어떻게 이별을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나는 늘 헤어질 시기를 놓쳤던 것 같다. 내게 있어 연애는 서로의 실을 예쁘게 엮어 나아가는 일이었고, 이별은 얽힐 대로 얽혀버린 실타래를 가위로 댕강 잘라내는 일이었다. 가위를 들어놓고도 무서워서 한참을 망설였다. 정말 이 가위질 한 번이면 다 끝나는 거야? 내일부터는 정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거야? 상상만으로도 힘들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사랑해주는데 나는 더 이상 그만큼 사랑하지 않아서, 그게 너무 미안해서 이별을 말하지 못 했다.
그 핑계로 차일피일 미뤘다. 그래서 그 꼬여버린 실타래를 잘라내야 할 타이밍을 놓쳤고, 꼬이다 못해 매듭이 절로 끊어질 때까지 미루다가 가장 나쁜 방법으로 이별한 거다. 진작 끝난 관계를 방치하고 이별을 질질 끄는 동안 그들이 받았을 상처는 더, 더 커졌겠지. 이별을 말하는 순간은 그렇게 두려웠으면서, 마음이 떠나버린 나를 지켜보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낼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과거의 나에게 살짝 귀띔해줄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긴다면, 비겁한 이별을 하지 말라는 얘기를 꼭 전하고 싶다. 무조건 만나서 이별을 하라거나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얼굴 보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면 전화나 문자도 괜찮다. 다만 '이별의 타이밍'을 놓치지는 말라는 그 말을 해주고 싶다. 더 이상 관계에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마음이 충분히 식었다고 느낄 때, 다른 사람과의 미래가 그려질 때,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도저히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없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이별을 해야 하는 '바로 그때'를 놓쳐선 안 된다고 말이다. 최선을 다해보지도 않고 섣불리 이별한다던가,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채 새로운 시작을 시작한다든가, 질질 끌다가 바닥을 치면서 헤어진다든가...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이별은 더 큰 상처를 남긴다고, 제때 헤어지는 것이야 말로 상대방에겐 최소한의 상처를, 나에겐 최소한의 후회를 남기는 길이라고 말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여전히 이별은 자신 없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별은 또 미래의 어딘가에서 날 기다리고 있겠지. 어렵겠지만 그때마다 '이별까지가 연애'임을 기억하려고 한다. 이별까지 최선을 다할 거다. 그래야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 후회하는 대신 그 찬란했던 시간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이 글을 읽었다면 여러분도 이별 앞에서 용기를 내길 바란다. 사랑의 시작점에서 우리가 그토록 용기 냈던 것처럼.
글 양유정
그림 소우주 (instagram@sowoojo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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