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만 하면 자존감 낮아지는 어느 사랑꾼의 이야기
연애가 파국으로 치달을 때마다 내게 전화하는 L. 10년 넘게 L의 연애 상담을 도맡으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그의 여자친구는 매번 바뀌는데 연애 패턴은 항상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호감을 표현하는 건 여자 쪽이지만, 막상 연애를 시작하면 L은 어느새 지독한 '을'이 되어 있었다. L의 연애는 (대부분) 반년도 못 만나고 차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외모도, 성격도 모두 멀쩡한데... L의 연애 방식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L의 연애 타임라인을 되짚어보자면 이렇다.
L이 스무 살 이후로 처음 만난 여자친구 A. 그녀의 이름을 들으면 아직도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비가 오던 어느 날이었는데, A는 어김없이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데리러 오라며 L을 불렀다. (못 간다고 하면 일주일 이상 삐질 게 분명했으므로) L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급하게 빠져나왔고, 선물로 줄 인형까지 뽑아들고 달려갔더랬다. 근처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고 하니, A는 차를 안 가져온 거냐며 "그럼 굳이 왜 왔어? 안 와도 돼."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연애하는 내내 A는 데리러 와라, 데려다줘라,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면서 L을 부려먹었고, L은 헤어지는 날까지 그녀의 매니저 생활을 하다가... 차였다.
L이 대학에서 만난 여자 B. 그녀에겐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남자친구와 사이가 안 좋을 때마다 L을 불렀다. B는 "L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좋다"면서 남자친구로부터 채워지지 않는 부족한 애정을 L으로부터 충족시켰다. L은 곧 남자친구를 정리하겠다는 그녀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이 순진한 L을 어찌한단 말인가!) 몸과 마음을 다 주었다. B는 금방이라도 L에게 올 것처럼 간 보다가 반년이 지날 무렵 손절했다.
대학 졸업 후 만나게 된 여자친구 C. 그녀는 가족끼리의 일본 여행에 L을 불렀다. L이 일본 여행을 자주 다녔기 때문에 가이드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 거다. 여자친구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었던 L은 흔쾌히 승낙했다. 문제는 여행 일주일 전 C가 잔뜩 화가 났다는 것. L이 그녀의 사진으로 설정해두었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다른 사진으로 바꿨다는 게 이유였다. L이 매일 장문의 카톡을 보내며 미안하다고 했지만(L이 이정도로 잘못한 건지는 진짜 모르겠다), 결국 C는 출국 당일까지 화를 풀지 않았다. 그 상태로 L은 여자친구 가족의 해외여행에서 여행 가이드 역할에, 광대 역할까지 다 했다고... 그렇게까지 했는데 그녀는 화를 풀기는커녕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L을 차 버렸다.
비교적 최근에 만났던 여자친구 D. 그녀의 아르바이트 일정 때문에 둘은 데이트 날짜도 그에 맞추어 잡았다고 했다. 황당한 건 데이트 약속이 먼저 정해졌는데도, 갑자기 친구가 만나자고 하거나 아르바이트 대타를 부탁받으면 D는 당연하다는 듯이 L과의 약속을 취소했다는 거다. 데이트 일정은 일주일씩 우습게 밀렸고 L은 언제 다시 D가 만나자고 할지 몰라 스케줄을 최대한 비워두어야 했다. 참다못해 서운함을 표현한 L에게, D는 '왜 이런 걸로 뭐라고 하냐'며 이별을 통보했다는 후문이다.
아무리 내 친구라지만 L은 호구가 맞다. 되짚어보니 더 확실하게 호구구나 싶다. L은 여자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했다. 여자친구의 기분이 안 좋을 땐 감정 쓰레기통을 자처했고, 30분을 만나기 위해 왕복 3시간을 운전했으며, 여자친구의 생리 기간엔 간식을 한 보따리 사다 바치고도 일주일 내내 눈치를 봤다. 평소에도 '어떻게 이렇게 예쁜 애가 내 여자친구가 됐을까?', '내 여자친구는 내가 공주님으로 만들어 줄 거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으니 말 다 했다. L은 스스로를 '을'으로 만들었다.
하루짜리 사랑도 널린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이런 벤츠 같은 애가 다 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슬프게도 L의 예쁜 마음이 비극의 화근이 됐다. 여자들은 대체로 L의 다정하고 헌신적인 모습에 반했지만, 내가 아니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사람에게 계속 매력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희소성 높은 것에 더 소유욕을 느끼고,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잃는 인간의 본성 때문일까. L이 하나뿐인 여자친구를 공주님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상대는 L의 호의를 부담스러워하거나 마음이 식었다. 어떤 이들은 L이 베푸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심지어 이용하기도 했다. 상대방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 L은 이미 잘해주면서도 더 잘해주려고 했고, 잘해줘도 상대방이 떠날 것 같다는 예감에 불안해했다. 그렇게 연애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도, 더 안달복달하게 되는 쪽도 L이었다.
아낌없이 주다가 뻥 차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버리는 L의 슬픈 연애. '네가 베푸는 사랑을 고마워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된다'라고 말해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서 너덜너덜해진 채로 내게 전화하는 L에게, 더 이상은 이상적인 조언을 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잔인하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지 말라는 것. 사랑이든, 마음이든, 물질적인 것들이든 간에 말이다. 받은 만큼만 주는 계산적인 연애를 하라는 게 아니라(L 성격에 어차피 못하겠지만), 적어도 준 만큼 받을 수 있는 연애를 하라고, 그렇게 말했다.
물론 사람 사이의 관계가 50대 50일 순 없다. 조금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랑에도 확실한 기브 앤 테이크가 필요하다. 혹시라도 내 마음이 상대방의 것에 비해 너무 무겁다면, 그 정도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출 줄도 알아야 한다. 마음의 크기를 조금 줄여볼 줄도 알아야 하고, 준 만큼 사랑을 받아낼 줄도 알아야 한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란 걸, 함부로 대하면 나도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틈틈이 어필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 평등한 연애를 위해서 정말 그렇게 해야 한다.
마음을 조절하는 건 또 다른 의미에서 도움이 된다. 모든 연애엔 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른 척하고 싶지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이별이 찾아온 바로 그때를 위해, 나를 추스를 정도의 마음 한 조각은 남겨두어야 한다. 끝을 염두에 두는 연애라는 게 조금은 슬프게 들리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끝을 기민하게 생각하는 것이 더 오래, 행복하게 연애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 소중해질테니 말이다.
사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한편으로 난 연애에 올인할 수 있는 L이 부럽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못 했기 때문이다. 첫사랑에 데인 이후로 마음을 딱 80%까지만 표현하는 게 습관이 됐다. 상대방의 마음이 70%인 것 같으면 나는 60% 밖에 안 되는 척했다. 마음을 다 주고 싶은 마음이 턱 끝까지 차오르다가도 언제 닥쳐올지 모를 이별이 무서워서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감췄다. (의도한 게 아니라 정말 습관이 됐다.) 그렇다 보니 100%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할 만한 연애가 몇 없다. 뭐, 그 덕에 밀당에 성공해서 긴 연애를 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더 잘해줄 걸, 그랬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하는 미련과 함께, 표현하지 못한 딱 그만큼의 마음이 후회가 되어 오래오래 남았다. 반면 L은 달랐다. “내가 매력이 부족한 걸까?” 하면서 자책하긴 했지만,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대신 항상 미래를 그렸다. "다음에 만날 여자친구한테는 더 잘해줄 거야!"라면서. (으이구, 이 화상아...)
연애에 정답은 없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주고싶은 만큼 다 퍼주면서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지만, 상대를 자만하게 만들기 십상인 연애. 나중에 어떤 후회가 남을지 모르지만, 사랑해준 만큼 사랑받으면서 대등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연애. 뭐가 더 행복할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후자가 더 오래갈 거란 사실만큼은 확신한다. 그나저나 L은 다음에 어떤 연애를 하려나...
글 양유정
그림 소우주 (instagram@sowoojo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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