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있는 사랑도 사랑인가요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랑이 의심스럽다면

by 양유정

오랜만에 H를 만났다. H는 20살 때 만난 대학 친구인데, 우린 서로의 시시콜콜한 연애사를 공유하며 고민을 들어주는 사이다. 시원한 호가든을 두 잔째 들이켜던 H는, 어김없이 묵혀뒀던 고민을 꺼내놓았다.


"나 요즘 내 사랑이 조금 의심스럽다?"


그래. 놀랍지도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이 친구는 초초초장거리 연애 중이다. 서울과 제주 정도만 됐어도 내 연애 데이터를 총동원해 뭐라고든 조언을 해줬을 텐데... 하필 그녀의 남자친구는 캐나다에 있다. 비행기를 타고서도 최소 열 시간이 걸리는 그곳. 심지어 나는 가본 적도 없는 나라다. 한 번 만나려면 긴 시간을 비워야 하고, 비행기 값에, 숙박비에, 돈도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다. 그래도 예전엔 몇 달에 한 번씩이라도 오가며 만났는데, 올해는 코로롱 녀석 때문에 그마저도 못 만난 거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얼굴 본 게 거의 1년 전. 요즘도 시차 때문에 아침과 밤에 잠깐 연락하는 게 전부라고 했다. 남자친구랑 일주일에 서너 번씩 데이트하는 것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나로서는, H의 인내심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만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견딜 만 한데, 정말 힘든 건 따로 있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남자친구에 대한 사랑이 의심스러워졌단 거였다. 너무 오래 못 만나다 보니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게 맞나 싶고, 자기가 이런 의심을 하고 있단 사실을 꿈에도 모를 남자친구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그때부터 H의 고민이 시작됐다고 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이렇게 흔들리는데 이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자주 만날 수 있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였나, 하는.


그동안 나도 H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내겐 연애를 거듭 실패하면서 만들어둔 구체적인 '조건 리스트'가 있었는데,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상대방 자체가 아니라 조건을 사랑하는 것 같아서 내 스스로가 속물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마음과는 달리 내 조건 리스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 인상이 선하고 키가 큰 사람, 쿵짝이 잘 맞는 사람, 전화를 자주 해주는 사람, 직장 위치가 비슷해 자주 볼 수 있는 사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 등등. 그리고 지금 딱 그 조건을 갖춘 사람과 연애 중이다. 무해한 웃음과 순한 눈매, 폭 안기고도 남는 큰 키와 덩치. 나와 같은 취미를 가진 것도, 좋아하는 영화나 음식이 비슷한 것도, 통화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직장이 서로 가까운 것도 아주 딱이다. (갑자기 애인 자랑해서 죄송.) 그런데 만약 그의 조건 몇 개가 맞지 않았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날카로운 인상의 외모를 가졌다든가, 무뚝뚝한 성격이라든가... 그래도 그와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지속할 수 있었을까? 아니. 왠지 친구도 못 됐을 것 같다.


H도, 나도 충분히 혼란스러울만했다. 우리는 '조건 없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외치는 판타지에 둘러싸여 살아왔으니 말이다.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이 온갖 악조건을 이겨내고 끝까지 사랑을 지켜내는 로맨스물이 세상천지다. 열악한 환경에도, 제삼자의 숱한 방해에도 그들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 그때마다 나는 일종의 숭고함을 느끼며 무릎을 탁 쳤더랬다. "그래, 저게 진짜 사랑이지!"라면서.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다. 끝이 보이는 시한부 연애를 피하려면 조건부터 맞아떨어져야 한다. 3일에 한 번은 데이트하는 게 좋은 사람도 있고, 한 달에 두 번 정도만 만나는 게 적당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 쉴 새 없이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게 좋은 사람이 있고, 하루에 한 번만 전화로 얘기하는 게 편한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조건 없는 사랑'이 가능하겠는가. 이 얘길 하니까 딱 떠오르는 전 남자친구가 있다. 외모로 치면 정말 내 스타일이었던 사람이었는데, 생활 패턴이나 데이트 방식이 너무 달라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나를 바꿔보려고도 했고, 그도 바뀌어보려고 했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다. 애초에 맞지 않는 조건을 바꿔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동안 사랑은 서서히 식었고, 우리는 몇 달을 더 불행하다가 끝내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조건이 다른 사람을 붙잡고 억지로 이별을 미뤄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삐걱대는 관계가 지속되다가 사랑은커녕 미움만 남았다.


사랑에 조건이 이렇게나 중요하다니... 사랑에 대한 환상은 조금 깨졌지만 그렇다고 실망스럽진 않다. 평탄한 연애를 위해선 조건이 중요하지만, 사랑을 더 견고하게 하는 건 조건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난 타이밍'과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 같은 것이 그렇다. 비슷한 조건을 가진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그때 그 순간에 그렇게 만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니까. 마찬가지로 H의 사랑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가진 조건들의 집합체라서 조건의 일부가 달라지면서 조금은 흔들리겠지만, 그를 만난 타이밍과 그와 함께한 시간이 더해져 쉽게 끊어질 수 없는 차원의 사랑이 되었을 것이다. 캐나다에서 다른 여자랑 바람피우는 건 아닌지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조건 있는 사랑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지'를 의심하는 H의 사랑. H가 그날 꺼내놓은 고민 속엔 너무도 견고한 사랑이 있었다.


Love Actually-thumb.png


그래서 H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초초초장거리 연애에 지쳐 헤어졌을까? H의 심경 변화가 궁금해질 때쯤 연락이 왔다. 혹시나 이별을 결정했다고 하면 한바탕 위로해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선물을 잔뜩 사서 캐나다로 보냈다고 했다. 해외배송비가 11만 원이나 들었다는 뒤이은 말에 한참을 웃었다.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속은 터지는 듯했지만 그래도 H는 행복해 보였다. 조건 있는 사랑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자만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이날 H에게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난 우리 모두의 '조건 있는 사랑'을 응원할 생각이다. 나아가, 더 적극적으로 조건 있는 사랑을 찾으라 강조하고 싶다.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나보라는 가벼운 이야기도 아니고(관계를 맺고 끊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너무 깐깐하게 조건을 내세우며 사람을 만나라는 것도 아니다(그러다 아무도 못 만나는 수가 있다). 어차피 연애를 할 거라면,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사람과 잘 맞는지, 그래서 어떤 조건이 중요한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반드시 행복한 연애에 도움된다는 거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다고 했던가. '조건 리스트'를 고민해봤던 사람만이 운명적인 연애를 쟁취할 수 있다.


추신.

무엇보다도 H의 남자친구는 그녀의 이상형에 완벽히 부합한다. 작년 초 그가 잠깐 한국에 왔을 때 인사를 했는데, 외모며, 성격이며... 7년 동안 누누이 들어왔던 그녀의 이상형을 현신시켜놓은 것만 같았다. 지금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을 빼면 정말 완벽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느 날 H의 조건 리스트에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추가된다면, 그리고 그 조건이 H에게 너무도 중요해진다면 그땐 주저 않고 당장 이별하라고 말하겠다. 연인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관계는 없으므로. 그렇게 되기 전에 코로롱 시국이 종식되어 그 둘이 맘 편히 만날 수 있길 바라야겠다.




양유정

그림 소우주 (instagram@sowoojoo_)




연애 이야기를 메일함에 배달해드립니다 ☞ 여기를 눌러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세요!

keyword
이전 01화연애 액츄얼리 :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