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샤넬, 디올, 판도라 다 갖고 싶은데!
얼마 전 남자친구가 신발을 사겠다고 해서 같이 백화점에 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희가 방문했던 날이 딱 3일간 진행되는 해외 패션대전 행사 기간 중 하루였지 뭐예요. 구찌, 생 로랑, 버버리, 발렌시아가 등 여러 명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구경하는 사람들로 행사장이 북적였습니다. 가격표를 보니 지갑이나 겨우 들어갈 법한 사이즈의 가방이 200만 원, 좀 예쁘다 싶으면 300만 원. 누군가는 턱턱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저한테는 숨이 턱 막히는 가격이었습니다.
그래도 구경하는 김에 구찌 가방 중 사이즈도 괜찮고 디자인도 괜찮은 아이(?)를 한번 어깨에 메보았습니다. 오... 역시 이름값을 하는 것 같았어요. 잠깐이었지만 제가 뭐라도 된 기분이 들더라고요. 거울에 비친 제 모습(근데 이제 구찌 가방을 멘)을 보며 남자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어때? 예뻐? 나랑 잘 어울리지"
어울린다고 하면 할부를 끊어서라도 살까, 잠깐 고민했는데 남자친구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오른쪽 어깨에 돌이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힘이 잔뜩 들어갔는데?"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방에 흠집이라도 날까 봐 노심초사한 나머지 오른쪽 어깨가 굳어버렸던 겁니다. 명품 처음 대하는 티를 숨길 수가 없더군요. 남자친구의 말을 듣고 다시 거울을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과연 내가 구찌를 산다고 한들 잘 메고 다닐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요. 흠, 메고 다닐 수야 있겠죠. 그런데 구찌 가방을, 원래 가방처럼 메고 다닐 수 있겠느냔 말입니다. 지하철에선 사람들이랑 부딪혀 흠집이라도 날까 저보다 가방을 더 소중히 할 게 분명하고요. 화장품이 새기라도 할까 봐 파우치는 따로 들고 다닐 것 같네요. 그러면 이걸 가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요즘엔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옷도 가방도 신발도 본래의 기능과 다르게 사용되고 있죠. 옷은 더 이상 보온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고 가방도 소지품을 담는 용도로만 사용되지 않는 것처럼요. 명품이 주는 암묵적인 메시지도 있고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든가, ‘티파니에서 아침을’ 같은 영화 제목에 명품 브랜드명이 활용된 것도 그런 맥락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가방을 지극히 가방처럼 쓰는 사람이거든요. 긴 출퇴근 시간에 읽을 책과 제 최애템 아이패드, 오후 세 시쯤이면 무너져내리는 화장을 고치기 위한 파우치까지. 저는 많은 물건을 넣을 수 있는 가방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제가 쓰는 가방은 금방 늘어나고 망가지기 십상이었어요. 그런 제가 과연 명품 가방에 그 많은 짐을 넣고 다닐 수 있을까요? 또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과 부딪히고 스치는데, 가방에 흠집이라도 날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까요? 점심시간엔 회사 책상 위에 그 가방을 올려놓고 마음 편히 밥이나 먹고 올 수 있을까 싶고요.
이제야 이해가 가더라고요. 왜 당근 마켓에 올라오는 명품 가방 중에 '실착 10회 미만'이 많은지 말이에요. 나라면 너무 자랑하고 싶어서 매일매일 들고 다닐 텐데, 왜 몇 번 들지도 않고 당근 마켓에 팔아버리는 건지 의문이었거든요. 그런데 알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지 않'는 게 아니라 '들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요. 근사한 곳에 놀러 갈 때, 데이트할 때, 결혼식 갈 때, 뭐 이럴 때나 들지 일주일에 5일을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라면 들고나갈 일이 거의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몇 번 못 들고 보관하다가, 먼지 쌓여가는 가방이 안타까워 좋은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당근 마켓에 팔아버리시는 게 아닐지 추측해봅니다. (아끼면 똥 된다는데, 다행히 명품은 중고시장에서 꽤 좋은 가격으로 되팔 수 있으니 다행이에요!)
또 그 가방을 메려면 그에 어울리게 옷도 갖춰 입어야 하잖아요. 싸구려 티셔츠에 샤넬 가방을 멜 수는 없으니까요. (상상해보니까 이것도 꽤 폼 나긴 하네요.) 하필 저는 편한 복장이 아니면 일을 못하는 병에 걸려버렸지 뭐예요? 명품 가방을 메려고 맨날 반듯한 옷을 차려입을 생각을 하니, 벌써 갑갑합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예전에 어딘가에서 읽었던 글 중, 커튼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집 전체 인테리어를 바꾸게 됐다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찌 가방을 메려면 옷도, 신발도 명품으로 입고 신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딱 구찌 가방까지만 사고 멈추지 못할 것 같더라고요. 그랬다가는 10년 안에 내 집 마련(제 꿈입니다)은 커녕 한 달 생활비로 쓸 돈조차 안 남을 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얼마 전부터 부쩍 명품 가방을 갖고 싶단 생각이 종종 들었어요.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라는 드라마를 정주행했는데, 6화에 20대 신입사원이 명품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클라이언트에게 무시당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거든요. 그걸 보고 극 중 임수정(배타미 역)이 가방에 있는 짐을 탈탈 털어 꺼내고 비싼 가방을 선물하면서 이렇게 말해요. "가진 게 많으면 감춰야 하고, 가진 게 없으면 과시해야 하거든요."라고요. 가진 게 없는 20대일수록 사회에서 무시받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과시는 필요하다는 뜻이겠죠. 그런가 하면 요즘 주변에 명품을 사는 친구들이 많다잖아요. 심지어 대학생들도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 명품을 산대요. 나는 이제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인데,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명품 가방 하나쯤 사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명품 가방 들면 괜히 품격이 올라가는 느낌이 들 것 같고요.
명품을 갖고 싶은 마음과 제대로 쓰지 못할 것 같은 마음. 그래서 당분간은 명품을 사지 않기로 했지만 내적 갈등은 앞으로도 꽤 오래 지속될 것 같습니다. 당장 길거리만 걸어도 사람들이 어떤 가방을 메고 있는지부터 쳐다보게 되었다니까요? 돈이 많은 사람들은 고민도 하지 않고 살테지만, 작고 귀여운 월급을 모아 구매하는 첫 명품 가방의 짜릿함은 20대 사회초년생의 몫이니 좀 더 이 내적 갈등을 즐겨보려고 합니다.
저, 언제쯤 명품가방을 지르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