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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유정 Jun 16. 2021

5평 원룸이 가져다 준 다섯 가지

스물일곱에 시작한 자취 라이프


급식을 졸업할 때까지 내 생활 반경은 거의 도보 30분 이내였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와 딱 붙어있어 집에 있으면 학교 종소리가 들릴 정도였고, 그나마 집과 떨어져 있던 학원도 걸어서 15분 만에 오갈 수 있었다. 그런데 스무 살 이후론 달랐다. 원하던 서울권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어마어마한 대중교통 지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 일산에서 통학 : 버스로 20분(근데 배차 간격이 20분 이상)+지하철로 35분 + 도보 10분 = 1시간 25분
- 부천에서 통학 : 버스로 10분+지하철로 55분(근데 1호선이라 최소 10분 이상 연착) + 도보 10분 =  1시간 25분
- 부천에서 출퇴근 : 버스로 10분+지하철로 40분(근데 1호선이라 최소 10분 이상 연착) +도보 10분 = 1시간 10분


그러니까 20살 대학생 때부터 직장 생활을 하던 얼마 전까지 넉넉하게 편도 1시간 10분에서 30분 정도에 걸쳐 경기도와 서울을 매일 오갔다는 것. 그 시간이 너무 어중간하기도 했고 (방금 이 글을 읽고 '그 정도면 통학(통근) 할 만 한데?'라고 생각한 불특정 다수의 당신처럼, 부모님도 같은 생각이셨다.) 비용 문제가 더해져 자취는 꿈도 못 꿨다. 본가가 서울이면 로또라는 말에 백 번 공감한다.


싱블리가 선물해준 자취 선물 몬스테라


그렇게 나는 거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대중교통과 전쟁을 치렀고, 약 7년 간의 치열한 통학(통근)은 나로부터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앗아갔다. 그리고 스스로 전세 대출을 받고 그 이자를 감당할 수 있게 된 지금, (드디어!!) 서울 한복판 초역세권에 채광 잘 드는 5평 원룸을 얻어 3개월째 살고 있다. 이 작은 방이 내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냐면... 너무 많아서 넘버링까지 했다.



1. 편도 40분, 왕복 1시간 20분의 여유

겨우 1시간 20 아끼려고 부모님이 해주시는 따뜻한 밥과 공짜 숙소를 포기하냐고 나무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침 6 50분에 일어나야 하는  ‘7 반에 일어나도 충분한 것’은 너무 다르다.  40분이지만 체감   이상의 여유로움을 안겨준다. 특히 잠들기 직전 마인드에  영향을 미친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은 수면의 질을 저하시킨다. 실제로 자취를 시작하기 전에는 자다가 새벽에   번씩 깨곤 했다.


게다가 1시간 20분은 정말 많은 것을   있는 시간이다. 100페이지 분량의 책을 읽을  있고, 여유롭게 드라마  편을 보고도 남는다. 낮이 짧은 계절에도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도착해 붉게 물드는 하늘을 올려다볼  있다.


아니, 애초에 24시간 중 1시간 20분이면 엄청난 비율인데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



2. 몸과 마음의 건강

스무 살 때 나는 공황장애를 얻었다(ㅂㄷㅂㄷ).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 하루가 멀다 하고 연착되는 지하철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탓이다. 숨은 막혀 오고 머리에 피가 쏠리는 와중에 절대 이 지하철에서 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면 내릴 정거장이 아닌 데에도 나는 헛구역질을 하면서 일단 내려야 했다. 한 번 생긴 공황장애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생 때는 러시아워 지옥철을 피할 수라도 있었지 직장인이 된 후로는 더 심해졌다. 작년에도 공황장애가 심하게 와서 회사에 못 갈 뻔했다. 지금은 지하철로 17분이면 회사에 도착한다. 도보까지 포함해도 30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조금만 더 가면 힘들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내려야 할 정거장에 도착하기 때문에 이사한 이후로는 공황장애가 발발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한 칸에 수십~수백 명의 승객이 타는 대중교통을 오랜 시간 타고 있으면 정말 못 볼 꼴 많이 보게 된다. 특히 1호선을 타고 출퇴근했던 지난 2년 간 살면서 볼 수 있는 지하철 빌런이란 빌런들은 다 본 것 같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인류애 상실은 덤.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 결론적으로 정신 건강에도 이로웠다.



3. 진정한 자유 혹은 해방

본가에서 다니던 시절에 자유가 없었던 건 아니다. 널찍한 내 방이 있었고, 부모님도 내 물건에 말없이 손대시는 분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생체리듬은 보통의 아침형 인간들과 달랐다. 내 에너지와 집중력이 극대화되는 시간은 거의 밤 10시부터 2시 사이였기 때문.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밤 12시 30분이다.) 부모님은 밤에 깰 때마다 번갈아가며 내 방에 들어와 안 자냐고 물으셨고, 나 또한 물 마시러 부엌에 갈 때나 화장실에 갈 때 가족들이 깰까 봐 지나치게 조심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글을 쓰든, 드라마를 보든, 뭘 하든 흐름이 깨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제 온전히 내 생체리듬에 맞게 생활해도 거리낄 게 없다.


+ 자유를 논하자니 집에서의 옷차림을 떼놓을 수가 없다. 아빠와 남동생이 있는 집에서는 샤워 후 화장실에서 옷을 다 입고 나와야 했고, 평소에 집에서 브래지어를 입고 생활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 벗ㄱ...이하 생략.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 해방이다. (나체를 유지하는 게 건강에도 좋다고 들었다.)



4. 엄마 아빠와의 평화

부모님과 정말 많이 싸웠다. 동생처럼 유순한 성격도 아니라 따박따박 말대꾸해대느라 더 그랬다. 부모님과의 평화를 위해 20대에만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놓치고 살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시는 부모님 마음도 이해하지만 내 행복을 위해 한 번 더 이기적으로 굴기로. 결론적으로 내가 집을 떠나면서 강제 평화협정이 체결된 셈이다. 서로 안 보는 동안엔 어쩔 수 없이 안 싸우고, 내가 본가에 가는 날엔 오랜만에 보는 거라 애틋해서 안 싸운다.


“결혼하기 전까지 같이 살고 싶어 했던 아빠, 미안. 요즘 캥거루족도 많은데, 일찌감치 독립했으니 기특하게 봐줘.”



5. 청소 빨래 등 집안일

집안일이라고는 설거지, 빨래 개키기밖에 할 줄 몰랐던 내가 이제 야무지게 집안일을 한다. 조금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빨래를 돌리고 쌀 1인분을 밥솥에 얹혀놓는다. 그동안 씻고 나와서 (엄마가 바리바리 싸준) 반찬들을 꺼내 밥상을 차린다. 밥 잘 챙겨먹는지 엄마가 걱정할까 봐 인증샷을 하나 찍어 보내드리고, 드라마를 보면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나면 정말 뿌듯하다.

엄마가 싸준 반찬들(소불고기, 진미채, 멸치볶음, 오이소박이, 부추김치 등)



언제 또 혼자 살아보겠는가. 내가 아직 자취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가? 만족도 200%다. 20대의 자취는 20대인 지금밖에 누리지 못하니, 혹시 자취를 고민하고 있다면 꼭 도전하시기를.




PS. 자취를 시작하면서 잃은 것

1. 반려묘 '꽁냥이'와의 시간

2. 돈(보험료, 대출금 이자, 공과금, 관리비 등 고정 지출 비용)

3. 아침마다 깨워주는 엄마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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