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실패의 이유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 수 있어? 아무리 많은 연인들이 만나고 헤어진다지만 우리는 다르잖아. 그렇게 믿었는데.
첫사랑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던 열여덟 살의 가을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슬픔이 분노로, 배신감으로, 절망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슬픔으로 돌아오길 반복. 내 몸의 큼지막한 부분이 뜯겨나간 듯했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우리가 사랑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해서 가슴을 퍽퍽 치며 울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 세수를 하다가, 문제집을 풀다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자기 전에는 같이 찍었던 사진과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다시 읽으며 울다가 잠들었습니다. 아무리 울어도 왜 눈물은 마르지 않는 건지. 아빠는 이별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딸을 보며 "이대로 죽을 거냐"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꼬박 1년을 깊은 바닷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별하는 마당에 잘잘못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아팠던 시간만큼 치열하게 생각했습니다. 나의 어떤 점이 우리를 갈라놓았는지에 대해서요. 그러다 최근에서야 그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무려 10년 만이네요.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떠올리고,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의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유레카를 외쳤던 것처럼 저도 오랫동안 기억 한 편에 자리했던 수수께끼가 해결된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 답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그전에 7년 간격으로 발생한 두 사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첫 번째 사건은 제가 열여덟 살이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느 날 밤, 그것도 아주 늦은 밤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도중에 거실에 놓여있던 낮은 상에 그대로 정강이를 부딪혔어요. 꽤 깊은 상처가 났습니다. 아픈 것도 그렇지만 다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바보같이 다친 제가 너무 한심했어요. 그럴 수도 있다고, 다음에 안 다치면 된다고, 얼른 약부터 바르자고 누군가 빨리 얘기해줬으면 좋겠는데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 남자친구였어요. 하지만 남자친구는 이미 잠든 뒤였습니다. 메시지도 보내고 전화도 했지만 연락이 될 리가 없죠. 내가 이렇게 아픈데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을 남자친구가 미워져 눈물이 났습니다. 다음 날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놀란 남자친구가 미안하다며 달래줬지만 제 마음은 누그러지지 않았습니다. 남자친구는 그냥 잘 시간에 자고 있었을 뿐인데, 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기억은 시간이 흐르며 잊혔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과거의 연애를 되짚어보다가 '어?' 하면서 멈춰 선 파노라마 속 기억 한 장면. 이번에는 스물다섯에 만났던 남자친구와의 일입니다.
그날도 아주 늦은 밤이었어요. 동생은 군인이었고 엄마, 아빠는 주말 동안 여행을 가셔서 집에 혼자였습니다. 현관문 밖에 분리수거할 쓰레기를 내놓고 들어오는데 날카로운 현관문 끝부분에 발가락이 찍혀 깊은 상처가 난 거예요. 괜히 안 하던 짓을 하다가 다쳤단 생각에 제 자신이 한심해졌습니다. 괜찮다고 말해줄 남자친구가 너무 절실한데 당시 갓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남자친구는 피곤해서 이미 잠든 뒤였어요. 저는 계속 전화를 걸었습니다. 빨리 전화를 받지 않는 남자친구를 원망하면서요. 한 번, 두 번, 세 번... 결국 반복되는 진동 소리에 남자친구는 잠에서 깼고,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왜 이렇게 늦게 전화를 받냐고 울면서 묻는 저를 한참이나 달래줬습니다.
어째 두 사건이 아주 비슷하죠? 시간이 늦었으니 당연히 깊은 잠에 빠졌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연락이 안 되는 게 당연한 건데, 그걸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미움의 화살을 방심하다가 다친 스스로가 아니라 당장 위로해주지 않는 남자친구에게 겨눈 겁니다.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몰랐으니 7년 뒤에 똑같은 행동을 했고 지금에서야 그날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렇게 찾아헤맸던 문제의 답을 발견한 거죠. 바로, 제가 너무 남자친구를 제 스스로와 동일시했다는 사실. 남자친구는 곧 나니까, 우리는 하나니까 언제나 남자친구가 저를 살뜰히 챙겨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저에게는 남자친구를 컨트롤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너무 당연하게도 우리는 별개의 인격체니까요. 저 두 사건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도 저는 제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을까요.
'우리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존중과 배려가 쉽게 생략됐고 남자친구는 종종, 어쩌면 자주 버거웠을 겁니다. 저는 왜 둘이 하나가 되는 게 연애고 사랑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이런 연애는 의존적으로 이어지기 쉽고 자칫 집착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는 걸, 지금은 잘 알지만 그땐 몰랐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연애의 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연애라는 게 서로의 삶에 흡수되는 병합되는 게 아니라 두 삶이 공존하는 형태임을 조금 더 빨리 깨닫고 인정했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그럼 남자친구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줄일 필요가 있었을 텐데.
첫사랑에 실패한 이유. 찾고나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 마음 속에 걸려 있던 밤톨만 한 무언가를 꺼낸 것처럼요. 처음 이별했을 때의 아픔이 슬픔에서 분노로, 배신감으로, 절망으로 이어졌다면 이제는 '미안함'으로 남게 된 것도 제 과오를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앞으로도 연애를 대하는 내 감정이 너무 의존적이지는 않은지 부지런히 돌아보려고 합니다. 남자친구는 내가 아니고, 연애란 분리된 두 사람이 공존하는 것일 뿐. 언제든지 홀로 남아도 담담히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두 발 꼿꼿이 딛고 살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려고요.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첫사랑에 실패했나요?
글 양유정
그림 소우주 (instagram@sowoojoo_)
잠깐 주목!
(저희 이제 레터로도 보내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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