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 산만언니>
그리고 같은 해, 운명인지 우연인지 공교롭게도 아빠의 죽음으로 학습한 생의 허무를 삼풍 사고를 겪으며 마스터할 수 있었다. 한순간에 아무런 맥락도 이유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죽음에는 예고는 고사하고 납득 가능한 서사조차 없었다. 마치 한여름에 하루살이 한 무리가 살충제 한 방에 맥없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처럼, 신의 모상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죽었다.
남의 아픔에 대한 토로는 사흘이면 까마득히 잊힌다. 당장 눈앞에 없으면 없는 아픔이나 다름없다. 그에 반해 나의 아픔은 극도로 예민한 사람의 과민성대장증후군 배와 같다. 조금도 과민을 지나치지 못하고 굳이 아파야만 하는 성정. 뭐 하나 신경이 쓰이면 꾸루룩꾸루룩 기어코 배를 뒤틀어 존재감을 드러내야만 한다. 내가 이렇게 아프다고 온몸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래, 나는 요즘 감히 삼풍 생존자보다 나의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힘들다. 타고난 불안, 1초 만에 앞날을 점지하는 능력 덕에 사흘 지났다고 내가 더 걱정스럽다. 아니 항상 그래왔다.
남의 아픔은 슬프지만 나의 아픔은 불안하다.
망했다.
이건 내 독후감인데 이런 글이나 쓰다니, 자격이 없다. 심지어 난 글을 읽으며 아픔을 글로 표현함에 있어서 부러움과 질투까지 느꼈다. 아, 그렇지만 내가 대장성증후군 배와 비교한 것은 요즘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를 읽고 있기 때문이지 부러움 때문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것이다.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한다. 아니, 내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다정소감'을 쓴 김혼비 작가를 좋아한다고 마음껏 말할 수 있다. 그의 글이 너무 유려하고 재밌고 잘 읽힌다고. 글을 너무 잘 써서 부럽고 질투 나고 참 좋다고.
그런데 산만언니 작가는 그렇게 말하기가 어렵다. 어쩜 저런 표현을 하고 마음을 울리지? 저 사람의 치열했던 삶에 대한 태도가, 스스로 결론을 내기까지 감내했던 그 과정과 그걸 다시 글로 표현하기 위해 들여다봐야 했던 심연들을 엿보는 것이 참 좋다. 저 사람 글을 참으로 잘 쓰는구나!라고 마음껏 감탄하기가 괜스레 겸연쩍어진다. 그리고 이건 내가 이 사람을 작가로 봐야 할지, 참사 생존자로 봐야 할지 모호해지는 지점이며 그 지점에서 내가 작가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찬양하기가 참 죄스러워지는 것이다.
모든 참사는 아프다. 너무 많은 아픔이 뒤섞여있어서 분리하기도 어렵다. 뭉치고 뭉쳐 블랙홀 같기도 하고 머리카락 뭉치 같기도 하고 무엇이든 간에 잘 보이지 않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하나하나 풀어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얼마 전 튀르키예, 시리아 지진 피해 소식을 들었다.
처음엔 사망자가 천명이라고 했던 것도 같고 오천 명이라고 했던 것도 같고 지금은 사만 사천 명이라고 한다. 숫자는 차가운 줄 알았는데 이건 너무나 뜨겁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고통의 블랙홀은 더 커져버렸다. 백 명의 사망자가 있는 참사라면 백 명분의 고통만 있는 게 아니라 최소 수십만 명, 수천만 명의 고통이 생긴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아프고 네가 아프고 다들 아프지만 모른 척한다.
생을 살기 위해 덮어두려 하는데 덮어둘수록 블랙홀은 커진다.
잠재우기 위해선 드러내고 파헤치고 분리해야 한다. 그래야 위안받을 수 있다. 살 수 있다. 그러지 못했던 세월호 참사가 떠오른다. 너무 많은 크고 작은 블랙홀들이 곳곳에 지뢰처럼 있다. 지뢰는 피할 수 없다. 그러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찾아내고 분해하고 해체하고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남은 인생을 마저 살아갈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사회의 블랙홀들을 찾아내고 분해하고 해체하고 제거하는데 꼭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가 참 부러웠나 보다. 이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나 위안이 됐기에. 이렇게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책이 좋아서. 난 생존자의 목소리들을 더 많이 아주아주 크게 듣고 싶다. 그들이 세상에 소리치고 감싸 안아주는 방식에 더 많이 위로받고 부러워하고 싶다.
이런 책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요즘도 가끔 지하철을 타면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본다. 아무 일도 겪지 않은 보통 사람들을, 순하고 무해한 그들의 표정을 본다. 보편적인 가정을 이루고 다정하게 사는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떤 꿈을 꾸며 무슨 생각을 할지 미루어 짐작해본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권태롭고 지루한 일상이 부럽다.
어느덧 이 꼭지가 마지막이다. 고작 이만큼 쓰는데 장장 2년의 세월을 쏟아부었다. 많은 날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고군분투해도 고작 보름에 한두 장 쓸까 말까 했다. 몰랐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초겨울 새벽 강가에 가볍게 맺히는 살얼음 같아서,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글로 옮겨오기도 전에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만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