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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오늘 May 16. 2023

우리 모두 3차원으로 살기 위해

<붕대감기 - 윤이형>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는 그런 분열과 자괴감 때문에 지현은 다른 사람들, 말하자면 바람 같은 사람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혼자라는 생각이 두려워 나와 같은 사람을 찾고 찾다 끝내 외로워지는 때가 있다. 나와 같아 함께 하는 사람을 찾고 싶기도, 나와 달라도 함께 하는 사람을 찾고 싶기도 해 그런 소설이 없으면 내가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 소설이 2020년에 출간되었다니.. 난 왜 이제야 읽었는지, 요즘 소설 읽기를 게을리했더니 이런 불상사가 생겼나?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참 시기적절하게 읽었구나.

나에게도 정말 다양하고 다정한 친구들이 있다. 그 안에서 나는 강성한 페미니스트가 되기도, 남자를 너무나 사랑하고 시대에 뒤처지는 사람이 되기도 했겠지.

그럴 땐 운동장의 구령대 앞에서 키 순서대로 줄지어 있는 학생이 된 기분이다. 뭐 결혼을 했어? 뒤로 가. 아 맞벌이야? 앞으로 가. 설거지는? 집안일은 얼마나 하니? 흠.. 앞으로 갈까 뒤로 갈까. 좀만 앞으로 가. 머리가 길어? 뒤로 좀만 가고. 아 화장 안 하면 좀 앞으로 가도 되지.

그렇게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엎치락뒤치락하다 결국 난 어디에 서있는 가. 

 기혼과 비혼, 출산과 육아. 돌봄 노동. 남성 페미니스트. 성매매 산업. 트랜스젠더. 탈코르셋. 수많은 담론에서 한 줄로 서있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가 이토록 분열되고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4차원에 존재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3차원이고 싶다. 들쑥날쑥하고 모순되더라도 그저 여성의 연대라는 단어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며 끝내 살아가고 싶다. 그래. 나는 끝내 살아가고 싶다. 혼자인 채가 아닌.





따라서 탈코르셋은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과 투블럭 커트 헤어스타일, 노브라로 요약되는, 탈여성화된 외모 규범을 요구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탈코르셋은 여성들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강요되고 내면화되어온 모든 팬옵티콘적 남성 감시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여성자결권을 획득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탈여성화된 외모 규범을 거치지 않고 팬옵티콘적 남성 감시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여성자결권을 획득할 수 있는가?

여성화된 외모 규범을 한번이라도 벗어나 본 경험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히잡을 쓰는 여성이 히잡에서 벗어나려 할 때의 사회적 위협을 생각한다면 무작정 벗어라!라고 할 수만은 없다는 건 인정하나 한번이라도 히잡을 벗고 길거리를 돌아다녀 본 경험을 한 사람과 하지 못한 사람은 0과 1만큼 다르다. 나 또한 코르셋을 벗지 못했다지만 제발 한번이라도 벗어보라는 사람이 '요구'한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페미니즘 담론 안에 있으면 탈코르셋이 압박으로 느껴진다지만, 정말로 이것만큼 코르셋을 요구하는 거대한 사회에서 한 줌인 건 없다. 잘 팔린다는 '아가씨'에서 끝물 '아줌마'로 가는데 외적 요구가 얼마나 달라지는지는 모르겠다. 나의 나이와 경험은 나이 든 여성에게는 이 '코르셋' 주제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잘 모른다.

 젊은 여성에게서 얼마나 많은 외적 압박이 개개인을 무너뜨리는지. 파운데이션을 바르면 걸레가 되는 교련 시대와 이젠 초등학생도 화장을 해야 하며 마스크를 벗기 창피해하는 이 시대는 결코 같지 않다. 탈코르셋은 화장을 하지 않고도, 초모리 브라를 하지 않고도, 긴 머리를 찰랑이지 않고도 예쁘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더 이상 사회에서 강요되는 여성의 외모에 가치를 부여하고 판단하지 않겠다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겠다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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