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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맨 Mar 28. 2023

사랑이 시작되는 이유는 체취 때문인지, 체온 때문인지

추운 겨울 핫팩을 주고받는 은밀한 행동에 관하여

유난히도 사나운 바람이 불던, 추운 겨울밤이었다.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은 그는 연신 울리던 단체 메신저의 알람을 끄며 '하필이면 강남에서 모이는 거야.'라고 투덜거렸다.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역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인파의 틈에 끼인 그는 썰물처럼 출구를 빠져나왔다. 꼭 바닷물에 몸을 맡기며 수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정시보다 한참이나 늦은 주제에 '바다는 역시 겨울 바다지.'라며 잡생각을 했다. 출구를 나와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모임 장소로 이동했다. 인파로 가득한 강남에서의 모임은 늘 그의 숨통을 조였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네트워킹이란 게 그랬고, 비즈니스라는 게 그랬다. 대체로 강남에서 만나야 뭐든 딜이 된다고 했다. 2층에 있는 작은 펍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에는 이미 그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도착한 상태였다.


"후래자삼배."

약속 시간에 늦은 그를 채근하던 A가 술잔에 술을 부으며 말했다. 고작 삼십 분 밖에 늦지 않았는데, A는 벌써 취기가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담배 냄새인지 술 냄새인지 모를 역한 A의 체취가 그의 코를 찔렀다.

"제 지인 중에 제일 부러운 놈이에요.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는 사람. 인사드려, 특별히 너에게 도움이 될만한 분들로 모셨으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의정부에서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의정부에서 왔다는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306 보충대가 있던 시절에 가봤다로 시작한 의정부에 관한 알은 채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으로 유명한 동네 맞느냐, 부대찌개 정말 맛있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서로의 명함을 교환하며 서로의 업을 물었고, 일이 자신의 삶에서 갖는 의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클라이언트 리스트를 늘어놓으며 언젠가 함께 협업을 해보자는 지키지 않을 공허한 약속들도 오갔다. 이미 이런 헛한 약속에는 익숙해진 그였다. 협업하자는 말은 '시간 날 때 밥이나 먹자.'라는 말처럼 공허했기 때문이다.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막차 시간이 다 되어서요."

반쯤 남은 맥주를 한 입에 털어 넣으며 그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저도 막차 시간이 다 되었는데, 일어날게요. 집으로 가는 길이 꽤 멀어서요."

가장 끝자리에 앉아있던 한 여자도 외투를 주섬주섬 챙기며 말했다. 아까부터 그를 빤히 쳐다보던 사람이었다. 둘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은 더 깊어졌고, 전보다 거리는 한산했다.


어색한 정적은 먼저 깬 건 그녀였다.

"의정부에서 왔다고 했죠? 어떻게 가면 돼요? 건대입구로 가면 되나?"

"환승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강남으로 올 때는 논현역에서 걸어와요. 저는 논현역까지 걸어가서 7호선을 타려고요."

"그럼 잘 됐다. 저랑 좀 걸을래요? 저도 논현역으로 가면 돼요."

"댁이 어디신데요?"

"저도 의정부에 살아요. 의정부에서 왔다고 해서 반가웠어요. 이런 모임에서 의정부 사람 만나는 건 처음이네."

"아까는 테이블이 멀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네요. 명함 드릴게요."

"저는 지금 명함이 다 떨어져서 명함이 없어요, 민욱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의정부 이웃."

여자 이름치고는 꽤 특이한 이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쩐지 낯이 익어요. 혹시 우리 어디에서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그가 물었다.

"아니요, 초면인데요. 근데 그쪽은 애인 있죠?"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또다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처음 하는 질문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적절하지 않은 질문을 먼저 한 건 그였다.

"네, 있어요."

"그럴 것 같았어. 그런 느낌이 있지."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 끝을 흐리는 그녀의 손끝에서 따뜻한 향이 났다. '그런 느낌'이라는 건 어떤 느낌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선을 넘는 질문인 것 같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만 그녀에게 나는 향이 무척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체온 때문인지 체취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지하철 막차에는 빈 좌석을 찾을 수 없었다. 그와 그녀는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각자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며 한강을 건넜고, 경기도로 향했다. 지하철은 금세 도봉산역에 도착했다.

"저는 여기에서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그쪽은요?"

"저는 버스가 늦게까지 있어서 버스 타고 내려서 조금만 걸어가면 돼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저도 반가웠어요. 그럼 이거 가져갈래요? 저는 택시에서 내리면 바로 집 앞이라 괜찮아요. 걸어가려면 추울 테니까."

그녀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손보다 커다란 핫팩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손발이 차서 겨울에는 늘 핫팩을 가지고 다녀요. 따뜻할 거야."

그녀는 미리 예약한 택시를 타고 떠났다. 멀어지는 택시를 보며 그는 핫팩이 몹시 뜨겁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하루종일 그녀가 지니고 다녔다는 핫팩을 받는 게 묘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쌀쌀맞은 첫인상과는 달리 낯 선 사람에게 핫팩을 건네는 게 꽤 사려 깊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왜 이런 생각과 기분의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함께 걸을 때 났던 그녀의 향 때문이었을지, 그녀의 향이 그녀가 남기고 간 핫팩에서도 은은하게 났기 때문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낯선 이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만옥이예요. 010-0000-000. 이 번호로 저장하시면 돼요.'

이제야 그는 그녀의 이름이 민욱이 아니라 만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휴대전화 번호를 눌러 그녀의 이름과 연락처를 저장했다. 어제 만옥이 줬던 핫팩을 만지작 거렸다. 어제처럼 뜨겁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그새 핫팩에서 나던 그녀의 향은 조금 더 진해졌고 선명했다.


'이상한 사람이네'

핫팩을 만지작 거리며 그는 생각했다.


'잘 잤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만옥에게 답장을 보냈다.



* <사랑의 모양>은 영화 <Shape of water>를 관람한 후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의 모양이 궁금해서 시작한 사랑에 관한 아카이브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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