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사서독>
기억, 상실, 그리고 잊지 못함
왕가위의 영화 <동사서독>은 화려한 무협영화의 틀을 빌리지만, 영화에서 칼과 검은 그저 장식일 뿐이다. 영화가 진짜로 겨누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그 기억이 남긴 상처다. 사막이라는 황량한 배경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인간의 집착과 번뇌를 상징하고, 인물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삶을 이어가는 인간들은 나약하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기억을 보존하는 장소, 사막
영화는 끝없는 모래바람처럼 흐릿하고, 또렷하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떠나고, 되돌아오고, 말을 삼키며, 말로써 상처를 남긴다. 그들의 고통은 칼끝에서 흘린 피가 아니라, 잊히지 않는 기억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지워내지 못한 마음의 파편이 어떻게 한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
"원하는 걸 가질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영화의 중심에 놓인 구양봉(장국영)은 기억과의 싸움에서 이미 진 지 오래다. 그는 "인간이 번뇌가 많은 것은 기억력 때문"이라는 말처럼, 사랑하는 여인(장만옥)과의 상처를 잊지 못해 사막의 외딴곳에서 살아간다.
그에게 매년 찾아 오는 친구 황약사(양가휘)는 '취생몽사'라는 술을 가져오는데, 그 술을 마시면 모든 기억을 잊을 수 있다. 하지만 구양봉을 그 술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야말로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매일 잊을 수 있다면 새로운 시작일 텐데"라는 희망을 알면서도, 그는 낡은 기억의 감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우리는 보통 상처를 잊기 위해 애쓴다. 잊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왕가위의 세계에서 망각은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죽음이다. (영화 <중경삼림>에서도 기억의 유통기한을 두고 고민하는 주인공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과 후회의 풍경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말하지 못한 한마디, 혹은 이미 지나간 사랑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구양봉은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고, 그 침묵은 평생의 고독으로 남았다.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며, 그는 사막에서 타인의 복수를 대신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묻는다.
사랑의 모습도 이 영화 속에서는 제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떠난 후에야 사랑을 깨닫기도 한다"는 대사처럼, 많은 깨달음은 늘 너무 늦게 찾아온다.
구양봉을 떠난 여인(장만옥)은 후회하며 고백한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이 제 곁에 없었어요.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시간은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 한탄은 사막의 바람 속으로 흩어지고, 남는 것은 끝내 지워지지 않는 상실뿐이다.
사랑을 말하지 못한 후회도 아프다. 구양봉은 단 한 번도 '사랑한다'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 침묵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때로는 말이 필요 없을 수 있다"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그래도 전 듣고 싶었다"는 여인의 고백은 마음의 확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깨닫는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말하지 않아도 똑같아요. 모든 건 변하니까요."
어쩌면 사랑은 붙잡으려 해도 붙잡히지 않는, 그저 흘러가는 순간의 감정일 뿐일지도 모른다.
끝내 잊지 못하는 기억
사막은 모든 흔적을 지우지만, 유일하게 남는 것은 기억이다. 그 기억은 칼보다 날카롭고, 바람보다 집요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칼이 아니라, 그를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끝내 잊지 못한다. 그래서 그 기억은 우리를 끝없이 살게 하고, 동시에 끝없이 죽인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을 괴롭히는 기억은 무엇인가. 그것을 끝내 잊지 않음으로써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구원할 것인가. 영화 속 인물들이 선택한 길은 서로 달랐지만, 한 가지 진실만은 설명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칼이 아니라,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끝내 잊지 못하기에 살아간다는 것. 20년 전쯤, 대학 동아리 워크숍 공연에서 이 노래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잊는 것보다 슬픈 건 잊혀지는 것."
https://youtu.be/-3esiqy4C3Y?si=J1AaUkUMbnhKIsCR
어쩌면 우리가 끝내 잊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잊히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