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
노라의 선택

by 김 스텔라

사람은 누구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 정상이지

어떻게 자유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수 있을까?

이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지금도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사랑의 기술'의 저자로 잘 알려진 에리히 프롬이 사회 심리적인 관점에서 실존적 자유를 역사를 통해 증명하고 개인이 처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내용을 간추려 본다면

역사의 흐름 (중세에서 근대)에서 본 자유로부터의 도피 : 중세 교회의 권위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과학과 산업, 인간 중심의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주어진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오히려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권위에 속해서 안정감을 누리고 싶어 한다. 이러한 도피 심리가 작용한 결과 나치즘과 같은 집단의식을 낳게 되었다.


도피 메커니즘; 인간은 개인적 자아의 독립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심리적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하고 권위자를 사랑하면서도 권위자로부터 벗어나고 싶어는 모순된 심리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완전히 스스로 살아갈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존이다. 그래서 권위주의의 파괴성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해 권위에 종속되어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은 절대적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실존의 한계 속에서 누리는 자유; 순응과 적응의 차이로 이해될 수 있겠다. 에리히 프롬은 자발성을 가지고 외부세계와 관계 맺으며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역시 '사랑의 기술'의 저자답다) 사랑하면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상대를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자발성을 가지고 사람들과 연결된다고 한다.


"사랑은 자발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사랑은 자아를 상대 속에 용해시키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소유하는 것도 아니며, 상대를 자발적으로 긍정하며 개인적 자아를 서로 존중하며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려는 욕구에서 생겨나며 사람 사이를 연결하지만 개체를 침범 하지지 않는다."

고 쓰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나 자신으로부터 탈피해서 사람을 사랑하면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도피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고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가 집을 나간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최초의 페미니스트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 책을 노라 나이쯤에 다시 읽었을 때도 사실 그녀가 집을 나간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경제력이 없는 여자가 집을 나가서 살게 되면 현실의 생활고는 그녀를 속박할 것이고 결국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것은 자기 감옥을 만드는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노라의 선택이 이 작품을 읽는 사람들을에게 미친 영향을 보면 결국 문학 작품에 대한 나의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의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노라는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발성을 위해서 집을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정을 버린 것이 아니라 가정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희곡의 말미에 나오는 대사도 ('기적'이라고 표현되는) 희망으로 끝난다.


노라; "우리의 공동생활이, 진실한 결혼이 되면 말이죠. 안녕히 계세요"

헤르마; "노라! 노라! 없어. 가 버렸어. (한 가닥 희망이 떠오른다) 그렇다. 기적 중의 기적이!"


여기에서 자유와 자발성의 민감한 차이를 의식하게 된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구분하기 어렵다. 다만 자유는 행동에 가깝고 자발성은 특성, 혹은 성격을 가리킨다.

그래서 자발성을 '자기 관리'를 뜻하는 영어의 Self-Conrol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왜냐하면 Self-Control은 성장과 성숙의 실제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미숙한 인격이나 성장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사춘기 청소년들을 보면 '내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어'의 빈도가 크고 절제하지 못해서 자유롭게 밖으로 터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자발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유를 주장하지 않아도 권위를 가지고 자신을 Control 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Control의 뜻 안에는 권위의 힘, 관리, 통제, 조종 장치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개인적으로는 '통제'(Restraining) 능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걸러지지 않고 쏟아지는 정보와 지식, 그것들이 내면에 영향을 주면서 생겨나는 생각과 감정과 내 의지를 무방비 상태로 두면 끌려 다니게 되고 자발성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를 하더라도 받아들일 것과 차단할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자발성은 노라의 선택에서 보듯이 나 자신에게서 우리에게로 향하고,

자유는 자유로부터 도피했던 나치즘과 같이 나에게서 우리끼리로 향한다.

우리에게서 나를 분리시켜 관계에서 떨어져 나오려고 할 때가 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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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분리될 수 없는 우리는 권위자와의 관계가 좋아야 행복하다.

사랑받고 존경할 만한 아버지를 원하고,

사랑하고 신뢰할 만한 배우자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이 자기 삶의 권위자가 되어 선택하는 권리를 행사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고 투쟁도 한다.

즉, 먼저 자기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라와 같이 안전한 감옥의 문을 열고 불투명한 내일을 향해 나가기도 한다.

우리가 되어서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고 나의 부모나 배우자, 그리고 자녀를 내가 원하는 데로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상대의 인격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사랑할 때 누구보다 먼저 내가 자유를 누리리라고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