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생각하며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로 물리적인 고립이 정신적인 단절로 이어질까 염려된다.
'홀로 있는 것을 사랑하라, 그러나 고립을 미워하라'는 어느 수도원의 표어처럼,
고독과 고립은 다르다.
고독은 일상의 분주함,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관계, 혼란스러운 마음에서 잠시 멀어져서 나를 묶고 있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러나 힘든 현실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고립되면 자유롭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는 감옥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홀로 걷다'.
이곳은 아닌데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고, 그러면서도 함께 하고 싶은 이방인의 실존에 가슴이 먹먹했다.
원제목은 '우리 중의 하나'이고 넷플릭스 한국판에서는 '홀로 걷다'로 번역했다.
이 두 가지 제목을 연결해서 '우리 중의 하나가 홀로 걷다'가 되면 내용을 잘 전달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함께 있는데 외롭고 소통하지 못한다.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어서 행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는 있어도 가는 길이 다르다.
마그리트의 그림에 있는 세 이방인과 같은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내용은 정통파 유대인 공동체의 하나로 실천윤리를 강조하고 배타적인 뉴욕의 하시디즘 공동체에서 떠나게 된 에티, 아리, 루저라는 세 사람의 이야기이다.
전개 방식은 각 사람이 공동체를 떠나게 되는 과정과 떠난 후의 상태를 다큐멘터리로 찍어서 서로 교차해가며 연결시키기 때문에 시작-과정-결말이 박진감 있으면서 여운을 남긴다.
에티는 하시디즘 공동체에 속한 여자를 대표한다. 여자에게는 공동체와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아이를 낳고 교육하는 일만 허락되어 있다. 불행히도 에티의 남편은 폭력을 가하고 비인격적인 사람이었다. 7명의 아이를 데리고 이혼을 결심하지만 공동체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고 할 수 없이 에티는 정부기관의 도움을 받아 지루한 양육권 투쟁을 한다. 결국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한 공동체가 승소하고 에티는 아이들을 빼앗기고 홀로 걷게 된다.
아리는 하시디즘 공동체의 청년, 다음 세대를 대표한다. 어릴 때 공동체의 한 리더로부터 성폭행 당했지만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공동체는 이 사실을 덮어버리고 아리는 그때의 트라우마로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이탈해서 마약중독에 빠진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중독 프로그램을 마치고 공동체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그 속에서 홀로 이다.
루저는 하시디즘 공동체의 현재를 대표한다. 그는 뉴욕의 중심지에서 고립된 공동체가 답답해서 넓은 세상으로 떠난다. 가정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좇아 배우가 되기 위해 엘에이로 온다. 공동체를 떠나면 아무런 경제적인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아서 마침내 배역을 맡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지만 그는 공동체를 그리워하며 홀로 남은 것을 힘들어한다.
이 영화는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는 같이 갈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속해 있기를 원하면서도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인간의 실존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다.
생존과 인생의 의미 사이, 곧 공동체와 개인 사이가 멀기는 해도 따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어느 한 가지도 절대 양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 이방인이 되고 고립된다.
나는 같은 여자라서 인지, 아니면 생존을 위협당하는 가장 절박한 처지여서 인지, 에티에게 제일 마음이 갔다.
스스로 고립된 하시디즘 공동체에서는 떠났지만 그녀는 공동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그녀의 이야기로 연결시키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는 권리가 아닌 '책임' 이라는 고리로 연결 되어있다.
에티는 고독 속에서 한 개인으로, 여성으로, 엄마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꿈을 꾸고 최선을 다하면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간다.
'홀로 있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돌아갈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