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3-1. 여행은 길을 잃는 것에서 시작된다

낭만과 책임이 공존하는 삶을 살아볼 것이다.

by 밝을 명 가르칠 훈 Feb 16. 2025

3장. 떠나고, 길을 잃고, 다시 나를 찾아가는 여행


떠나야만 했다.

그래서 떠났다.


어떤 시기가 그렇다.

마음이 너무 지쳐 있고,

모든 것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시간.

그때는 그저 멀리 가고 싶어진다.


사회복무요원을 마친 후,

나는 오랜만의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가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기로 했다.

손에 쥔 돈은 많지 않았지만,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모아둔 돈을 전부 이 여행에 쓰기로 했다.


준비 기간은 단 일주일.

첫날의 숙소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길 위에서 정하기로 했다.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즉흥이었다.


기차에서 다음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에 도착하면 다시 숙소를 찾고,

그렇게 모든 것이 흘러가듯 결정되는 여행.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여행.

그런 여행이 필요했다.


후쿠오카에서의 첫날


여행의 시작은 후쿠오카였다.

익숙한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나는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를 찾았다.


토리이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는 간절한 소원을 빌러 오겠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걸었다.

나무 계단을 오르며,

발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그때는 몰랐다.

이 여행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무엇을 남길지,

그리고 내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지.


다만, 이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신은 내게

길을 잃을 자유를 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나가사키, 그림이 된 순간


나가사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 도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바다가 있다는 것,

그리고 오래된 서양식 건물들이 많다는 것.

그뿐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작은 카스테라 가게,

창가에 앉아 조용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앞에 와서 말을 걸었다.


"잠시만요, 괜찮다면 그림 그려드려도 될까요?“

그의 손에는 작은 노트와 펜이 들려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나는 이 낯선 도시에서

누군가의 스케치북 속에 머물렀다.


그림이 완성되고

그가 건넨 작은 종이 한 장.

거기엔 나의 얼굴이,

그리고 이 순간이 담겨 있었다.


여행의 기록은

때로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남는다.

내가 카메라로 담지 못한 순간을,

누군가가 대신 그려준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여행이란,

이런 뜻밖의 순간들로 채워지는 것임을.


오사카의 맛


오사카에서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그저 이 도시의 에너지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다 난바 거리를 걷다가,

문득 타코야키 가게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커다란 철판 위에서

긴 나무 젓가락으로 반죽을 돌리는 손길.

그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


나는 조용히 줄을 서서 기다렸다.

주문한 타코야키가 손에 들어왔을 때,

그 순간이 묘하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작은 플라스틱 포크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에서 터지는 뜨거운 소스와

부드러운 반죽의 감촉.


아, 이게 오사카의 맛이구나.


그제서야 알았다.

이 여행은 거창한 순간들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작은 순간들이 쌓이며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는 다시 한 입 베어 물며

거리의 소음 속으로 걸어갔다.


나라에서 만난 사슴들


나라에서는 특별한 목적지가 없었다.

다만, 이곳에 오면

사슴을 보지 않을 수 없다고들 했다.


공원에 들어서자

정말로 사슴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관광객들이 건네는 과자를 받아먹으며

여유롭게 이곳저곳을 거닐고 있었다.


한 마리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가방을 열어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사슴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야?' 하고 묻는 것처럼.


나는 웃으며 그 사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이 여행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며 떠난 걸지도 모르겠다고.


시즈오카의 하늘에서


이 여행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시즈오카에서의 패러글라이딩이었다.


후지산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나는 하늘로 떠올랐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멀어지고,

오직 바람만이 내 몸을 감쌌다.


나를 지탱하는 것은

바람과 얇은 천 한 장뿐.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이내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만큼은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할지 모르는 미래도,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이 여행도,

모든 것이 그저 하늘에 맡겨진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그것이 여행이 주는 감각이었다.

불안과 설렘이 공존하는 순간.


가마쿠라의 추억


기차에서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가

가마쿠라에 내렸다.

도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역에서 바다로 향하는 길,

그 위를 달리는 전차.

마치 오래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슬램덩크의 엔딩 장면처럼,

바다를 배경으로 전차가 지나가는 그 순간,

나는 오랫동안 상상해왔던 풍경과 마주했다.


사람들은 유명한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그 풍경을 조용히 바라봤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전차가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하나의 리듬이 되어

내 안에 스며들었다.


도쿄의 낮과 밤


예전에 온 적 있는 도쿄,

여전히 이 도시는 낯설었다.

수많은 네온사인,

빛나는 간판들,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활기를 띠는 거리.


나는 그 속을 걸었다.

목적 없이, 그저 이 도시가 내게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며.


신주쿠, 시부야, 긴자, 아사쿠사.

각기 다른 색을 가진 이곳들을 걷다 보면,

마치 꿈속을 떠도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화려한 도시 속에서도

쉼표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공원으로 향했다.


햇살이 가득한 공원의 나무 아래,

나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곳에는 광고도 없고,

번쩍이는 네온사인도 없었다.


그저 잔디밭 위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벤치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


그때 나는 생각했다.

화려한 도쿄 속에서도,

햇살 아래 쉬어가는 이 순간이야말로

진짜 도쿄를 느끼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하코다테의 밤


하코다테는 처음부터 기대가 컸던 도시였다.

일본 3대 야경 중 하나라는

하코다테 산의 전망.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해가 저물어가고,

나는 로프웨이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는 풍경과 마주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모를 정도로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마주하면

나는 항상 이상한 기분이 든다.

너무 아름다워서,

마치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


그래서 나는 그저 조용히

그 풍경을 바라보기로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삿포로의 겨울


삿포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곳이 정말 '눈의 도시'라는 걸 실감했다.


도쿄와는 전혀 다른 공기,

하얀 눈이 덮은 거리,

그 위를 조용히 걸어가는 사람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삿포로의 밤은 조용했다.

눈이 쌓여 있어서

거리의 소음도 부드럽게 묻혀버리는 것 같았다.

그 고요한 거리에서 나는

따뜻한 국물이 있는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뜨거운 한 입,

그 순간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

이것이 여행의 낭만일까.

낯선 도시에서,

눈 덮인 거리에서,

따뜻한 한 모금이 주는 위로.


오타루의 겨울 멜로디


삿포로에서 기차를 타고 오타루로 향했다.

유리 공예와 오르골로 유명한 작은 항구 도시.

하지만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눈이 내리는 운하'라는 풍경이 보고 싶었을 뿐.


기차에서 내려 거리를 걷는데,

어디서든 오르골 선율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쌓인 눈 위를 미끄러져

퍼지는 것만 같았다.


거리를 따라 걷다 보니,

드디어 오타루 운하가 눈앞에 펼쳐졌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돌다리,

물 위에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

그리고 천천히 흘러가는 물살.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눈 내리는 운하라는 단순한 풍경 하나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순간, 이곳은 현실이라기보다는

마치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오타루의 겨울을 조용히 담아두었다.


니세코에서의 자유


이 여행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니세코 스키장에서의 3일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함께한 친구와

이곳에서 파우더 스노우를 경험하기로 했다.


눈이 내린 새벽,

나는 한국에서 사온 싸구려 장비를 가지고

정상에서 드넓은 설원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 후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속도감,

차가운 공기,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자유.


이 순간만큼은

어떤 고민도,

어떤 생각도 필요 없었다.

그저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이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감각.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진짜 자유였다.

눈 위를 미끄러지며,

나는 이 여행을 마무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 위에서


기차는 천천히 후쿠오카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지난 한 달을 곱씹었다.


처음 이 여정을 시작할 때,

나는 길을 잃고 싶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바람을 따라 떠돌며

아무 계획 없이 낯선 곳을 헤맸다.


그리고 결국, 나는 많은 곳에서 길을 잃었다.

후쿠오카에서 신사의 계단을 오르며,

나가사키에서 낯선 사람이 건네준 그림 속에서,

오타루의 운하 앞에서,

삿포로의 눈 속에서,

니세코의 설원을 가르며.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단 한 번도 정말로 길을 잃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길을 잃을 때마다 나를 찾고 있었다.


떠나는 순간,

낯선 곳에서 길을 잃는 순간,

기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순간.

그 모든 순간들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끝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3년 후, 나는 다시 도쿄에 있다


낭만을 찾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여행을 마친 후 나는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여전히 견뎌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낭만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것을 견디게 해주는 건 아니었다.

낭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시 무너졌다.


3년이 지나, 나는 다시 도쿄에 왔다.

이번에는 또다시 떠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머물기 위해 왔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의 1년이 끝나면,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미뤄왔던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낭만과 책임 사이에서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자유는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길을 선택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3년 전, 나는 낭만을 쫓으며 떠났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낭만을 찾는 법을 배웠다.

낭만이란 도망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여행을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삶은 단순하지 않았다.

낭만은 한순간의 도피로 해결되지 않았다.


책임이 없는 낭만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리고 책임만 남은 삶은 너무 무겁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낭만과 책임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할까.


이제, 도쿄에서 나는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

여기서 나는,

다시 길을 잃는 대신 길을 선택할 것이다.


도쿄에서 보내는 1년 동안,

나는 낭만과 현실의 경계를 탐색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할 것이다.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아

도시를 바라보는 순간,

이 거리의 소음 속에서

나만의 조용한 공간을 찾는 순간,

나는 낭만이 현실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일 것이다.


이제 나는 안다.

삶은, 여행처럼 즉흥적일 필요도,

계획대로만 흘러갈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도, 당신만의 낭만을 찾을 수 있기를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길을 잃는다.

그리고 길을 잃는다는 것은,

때로는 우리가 진짜 원하는 곳으로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길을 잃는 것도,

책임지는 것도,

낭만을 찾는 것도.


그것이 우리가

한 사람의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방법이니까.


나는 이제 도쿄에서의 1년을 시작하려 한다.

이곳에서 나는

낭만과 책임이 공존하는 삶을 살아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낭만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도 틀림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균형을 찾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 여정에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그 속에서

당신만의 낭만을 발견하기를.




이전 09화 2-4. 공간이 주는 위로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