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4일
어쩌면 이번에 남자분들이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간다고 할 때의 실제 뜻은,
'여자들이 자기네 기준으로 봐서 여혐하는 남자는 이번 살인자와 같은 인간임으로 그런 살인도 할 수 있다고 매도한다'
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남자 중에 여혐 안 하고 여자 편을 드는 남자는 잠재 범죄자가 아니겠지만 여혐하는 사람은 잠재 범죄자로 보여서 공포심이 들고, 이 판단 기준에 쓰이는 여혐이 뭔지는 여자인 우리가 규정한다, 가 되는 거죠. 이런 경우 남자는 완벽하게 여혐 안 한다거나, 남자로서 무조건 반성한다고 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항복해야 합니다. 여자들이 원하는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자를 칼로 찔러 죽일 수 있는 살인범 취급받는 겁니다. 곧 "내 편 아니면 니는 미래 범죄자".
온라인 분위기를 보면 내놓고 나는 페미니스트요 하는 극소수의 남자를 빼고는 다 여혐을 한다고 손가락질 하고, 남자분 자신도 아마 지금까지 '여혐'이라고 하는 행동들을 해 왔습니다. 여혐 단어인 '김치녀', '맘충' 단어도 써봤고 그 외 쏟아져 나오는 여혐의 예 중에 몇 개쯤은 해 봤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여혐러라고 라벨을 붙인 다음 너는 그런 말/생각/행동을 했으므로 살인도 할 수 있는 나쁜 놈이다, 이건 정말 불공평합니다. 이걸 인정하면 앞으로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내가 보기엔 확실히 존재하는 '김치녀'같은 단어 하나 썼다가 최소 일베, 혹은 어차 하면 사람 찔러 죽일 놈으로 사회에서 매장될 것 같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 범죄는 당연히 정신병이 이유라고 외칩니다. 여자들이 여혐이라 정의하는 것들은 거의 모든 남자들이 겉으로는 말을 안 해도 속으로 하는 생각들인데 이번에 정신병 남자 한 명이 어쩌다가 사람 한 명 죽인 걸 가지고 껀수 잡았다 싶어서 남자들 입을 다 막고 평범한 발언과 행동도 범죄화하려는 의도로 보이죠. 그래서 이게 성대결로 몰고 가는 것 같습니다. 여성들이 여혐으로 겪은 공포의 공감대 형성은, 이 일을 여혐 범죄로 만들려는 페미니스트들의 농간에 넘어간 언론 조작이고요.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 어느 정도 맞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자 입장에서 왜 아무리 잠재적 살인자 취급하지 말라 해도 이해를 못 했는지 말씀드릴게요. 짧게 요약해서 말하면 "그런 말이 아닙니다." 길게 말하자면.
여자 입장에서 여혐은 그냥 현대 사회의 사상입니다. 트위터에서 이런 글이 있었죠. "성차별에 대한 투쟁은 남녀 간의 싸움이 아니다. 내가 태어나서 겪은 첫 번째 성차별은 엄마에 의해 행해졌고 나는 평생에 걸쳐 싸워야했으니깐"
여자도 성차별하고 여혐합니다. 저도 여혐 발언 가끔 합니다. "여자 방이 이렇게 지저분하다" "난 얼굴이 무기다"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xyz 하다" "우리 딸은 예뻐서 인기 많을 거야" 등등. 애 엄마들도 그런 말 많이 하죠. "여자애가 좀!" "남녀 공학에서 여자애들이 너무 나서서 우리 아들들이 고생한다". 사실 여자는 어머니나 할머니, 그 외 주위 여자들에게서 여혐을 아주 많이 당했을 거예요. 여혐은 제도적이고 방송에도 넘쳐나고 그렇습니다. "나도 여자지만 여자들은 이래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직원을 그래서 안 뽑죠" 라 말하는 여성 기업인도 보이는데 남자들만이 여혐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여혐이 꼭 폭력적인, 위험한 여혐도 아닙니다. 여자라서 아껴주고 보호해주고, 여자라서 봐주고, "무서웠지 걱정하지 마 오빠가 해결해 줄게" 이것도 사실 여혐에 포함됩니다. Positive discrimination이라고 하죠. "여자라서 참 꼼꼼하게 일 잘 하네" "천상 여자답게 하는 짓이 이쁘네" 이런 칭찬도 넓은 의미에서 여성 차별/혐오에 들어갑니다. '혐오'라는 단어 때문에 오해가 많은데, '차별'에 가까운, 번역 참 잘 못 된 학계 단어입니다. 좋은 차별도 차별은 차별이죠.
여자에게 유리한 차별/여혐이 소위 김치녀를 만들었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보호해야 하는 존재니까 대접받아야 한다는 사상이 있으면 그 사상에서 이득을 보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여권 신장으로 김치녀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예쁜 여성을 우대하며 온갖 혜택을 주는 시스템이 그렇게 보이는 현상을 만든 겁니다. 여자에게 불리한 쪽의 여혐으로는 남자 형제 때문에 공부 못 한 여자들이 있고 그 수많은 추행, 폭행 이야기가 있죠. 양쪽 다 인간 역사 내내 있었던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여혐하는 사람이 무조건 남자라고 믿지 않습니다. 비교하자면 외모지상주의 정도로, 남녀 가릴 것 없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혐성 발언이나 생각, 행동 정도로 미래 살인자라고 자동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이, 페미니스트들이 싫어할 만한 발언이나 생각, 행동을 한다고 미래 살인자라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회에서나 폭력적인 구성원들이 있기 마련이고, 여자를 소모적인 대상으로 보고 화풀이로 만만하게 보는 분위기와 나쁜 치안에서는 여자가 더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지요.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서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기대는 여자는 가정폭력을 당해도 신고하기 힘듭니다. 이런 식으로 만만하게 보고 폭력이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꼭 남자가 아닙니다. 엄마는 만만한 딸을 더 구박할 수 있고, 시어머니는 사위보다 며느리를 갈굴 수 있죠.
그러므로 뒤에서 따라오는 당신이 '김치녀'란 단어를 써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여성 대상 추행/폭행 사건이 많은데도 여자들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아서 두려움에 떨며 가게 만드는 여혐. 당해도 여자 잘못으로 돌리는 여혐. "여자가 맞을 짓을 했겠지"라고 동조하는 이들의 여혐.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도 오히려 더러워졌다고 손가락질 하는 여혐, 사귀는 사이에는 다투다가 좀 때릴 수도 있고 좋아하면 스토킹도 좀 할 수 있고 부부 사이엔 강간이 없다고 하는 사회의 여혐이 두려운 겁니다. 그런 사회 내에서 폭력적인 사람은 때려도 큰일 없는 여자를 폭행/강간하기 쉽고, 당신 앞에서 길을 걷는 여자는 당신이 그렇게 여혐을 허용하는 사회에서 그 시스템을 완벽 체화하여 악용하는 "폭력 행사자"일까 두려운 겁니다. 폭력 행사해도 사회는 알아서 변명해줄 거거든요. 여자가 옷을 그리 입으니 그랬다. 그냥 욱해서 그랬다. 남자가 성욕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등등.
이런 종류의 폭력 행사자는 거의 대부분이 남자이지만 사회 인간관계에서의 여혐 발언은 남자보다 오히려 여자들이 더 휘두르기도 합니다.
당신보고 여혐 발언을 한 마디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니네는 남자라는 이유로 그저 죄인이니 앞으로 여자가 허용하는 발언만 해라, 안 그러면 여혐이고 잠재 살인자로 취급할 거란 말이 당연히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여자들 자신도 여혐 전혀 안 하기가 힘든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고방식이 바뀌기 바라겠습니까. 그저 극히 폭력적인 사람들이 만연한 여혐을 체화해서 여자들을 대상으로 쉽게 저지르는 강력 범죄가 많아 매일매일이 두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겁니다. 여성을 만만하게 여겨도 괜찮게 허용한, 당해도 가해자보다는 당한 여자를 탓하는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 도와달라는 말입니다. 최소한 목숨에 위협을 받지 않을 정도로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