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어 구사의 환상

2016년 6월 19일

난 영어를 제일 편하게 하고, 한국어는 꽤 편하게 하며, 아프리칸스는 남편과 일상적인 대화 가능하고 (시어머니가 내 욕하는 거 다 알아듣고 -_-), 프랑스어는 불문학 쪽으로 배우긴 했지만, 신문 읽고 뉴스 듣고 하는 데엔 문제없다. 독일어를 좀 배워서 B2 오래 전에 땄고, 그 외 이래저래 잡다하게 배운 언어가 엄청 많다. 독일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뭐 등등.

오! 양파는 다국어 구사자라고 생각 드시기 전에 제목 참조요. 다국어 구사의 환상 <- 이라고 썼죠.

언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말은 레벨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다국어 구사자란 콘셉트가 가능하느냐 아니냐가 갈린다. 나에게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라고 하는 것은 성인으로서 직장생활 활동이 가능하며 문서화/프레젠테이션에서 외국인이라고 봐주지 않아도 되는 레벨을 말한다. 20대 전에 배우는 언어는, 문법적인 기초는 다질 수 있다 하여도 레벨은 성인 언어 레벨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언어는 한 개 반이다. 영어와 한국어. 한국어로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고 한국에서 직장/사회생활을 해 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전문서적을 한국어로 자주 읽어 레벨을 높인 것도 아니라서, 블로그에 글 쓰는 정도 혹은 개인적인 대화를 할 때는 문제가 없으나 한국어로 보고서를 써야 한다든가 논문을 써야 한다든가 하면 많이 부족할 것이라 예상된다.

어린아이들 중에서 3개 국어 하는 아이들은 참 흔하다. 부모가 외교관이거나, 어릴 때 보모 손에서 자란 아이들은 4개 국어도 곧잘 한다. 그러나 '언어 레벨'에 있어서 사실 어린아이들과 어른들은 비교될 수가 없다.

쉬운 내용을 반복적으로, 하지만 좋은 발음으로 하는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에 얼른 듣기에 훨씬 더 유창하게 들릴 수는 있다. 그러나 언어는 문법과 어법에 익숙해지는 것이 초급이요 단어와 용법이 중급이고, 언어의 수준이 고급이다. 어린아이들의 외국어는 그러므로 초중급을 넘어서기가 힘들다(어린아이 = 15세까지).

외국에서 생활하는 분들이 이런 점을 자주 간과한다. 물론 당신의 꼬마는 학교에서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 없을 정도로 영어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영어와 '집 계약할 때 필요한 영어'는 완전히 다른 레벨이다. 아무리 한국말 잘 하는 초등학생이라도 신문의 주식정보 섹션 내밀고 설명해라 하면 어물거릴 것과 마찬가지 이유이다. 그 아이가 멍청해서도 아니고 꼭 단어 때문만도 아니다. 그냥 그 아이 언어 레벨이 아직 거기까지 닿지 않아서이다.

어느 정도 문법의 체계가 잡히고 기본적인 대화소통이 가능하기까지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한국인이 영어를 배운다든가 하는, 기본적으로 너무나도 다른 언어가 아니라면 1~2년 정도 일주일에 몇 번만 배워도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그 언어를 주로 하는 사회에서, 많은 배려가 필요 없는 성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스페인에 놀러가서 관광하고, 개인신상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나누기는 쉽다. 그렇지만 스페인어로 일하고 스페인어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건 더 이상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그 때부터는 시간 투자만큼 정직한 결과가 나온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어와 유럽 언어의 간극이 너무 커서 그 '어느 정도 문법의 체계가 잡히고 기본 적인 대화소통이 이루어질 때까지'가 오래 걸리다 보니 5개 국어라고 하면 다른 말 배울 때도 똑같이 그렇게 시간이 들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유럽 언어 중급 레벨로 배우는 건 아주 쉽다. 제일 마지막 레벨까지 닿는 것이 힘들지, 처음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래서 유럽에서 유행하는 언어 배우기 기술 이런 걸 들여오면 한국에서 망한다. 아예 차원이 다른 난이도라니깐).

어린 나이에 몇 개 국어를 구사한다면 뭐 그럴듯하게는 들리지만, 차라리 그 시간에 수학/코딩/교양 지식 공부를 더 시키겠다. 진정 언어 덕후로 수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언어는 두 개만 잘 하면 된다(양파 키보드에 피 토하면서 씀). 고급 레벨까지 구사하지 않으면 그거 가지고 먹고 살 일 없을 거고, 한 언어를 고급레벨까지 끌고 가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한 줄 결론: 

그냥 영어만 하세요 영어만.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