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3일
'내공 철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사고방식이 있다. 한국스러운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 내에서, 혹은 한국 사람에게서 좀 더 자주 본 거 같긴 하다. 이건 뭘 하더라도 초보와 고수가 있으며, 초보는 고수 앞에서 잘난 척하면 안 되고, 고수는 '니네 참 수준하고는 쯧쯧...' 혀를 차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와인을 마셔도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이 와인은 이렇고 저 와인은 저렇고 등등 줄줄이 꿰어야 하고, 그 앞에서 무식하게 싸구려 와인 마시고서 이 와인은 맛있네요 그러면 무시당하는 그런 상황.
참 많은 분야가 그렇다. 음악도 ‘덕후’가 되어야 진정으로 즐긴다 하고, 아무 팝 음악이나 듣는 나 같은 사람은 다들 까대는 유치한 음악 듣는다고, 그리고 솔직히 들으니까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난 그런 식으로 무식한 분야가 참 많다. 패션도 잘 모르고, 미술 쪽도 모르고, 순문학도 문외한이다. 그리고 그 분야마다 다 ‘족보’, ‘서열화’, ‘고수’가 있다. 아마추어 기죽게시리.
진정 고수들은 그냥 즐기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초보 입장에선 어떻게 즐겨야 잘 즐기는 건지, 어떻게 효과적으로 실력을 늘릴 수 있는지 늘 고민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냥 즐기면 된다는 말보다는, 괜히 안달 내다가 싫증 내지 말고 한 단계 한 단계 다 의미가 있으니 천천히, 유치하더라도 즐기면서 발전하라는 말이겠지. 아, 그러고 보니 코딩도 그렇구나.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고수가 될까 이런 거 고민하는 사람 많지. 그냥 간단한 거라도 하면서 즐거워하기에는, 너무나도 내공 철학이 내재되어 있어서 "이 유치한 수준을 내가 즐거워할 때가 아닌데" 걱정이 되는 그런.
유럽 여행 7박 8일인데 10개국을 돌아본다니까 그게 무슨 여행인가 싶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많이 돌아본 사람 이야기다. 한 번도 자기 나라를 떠난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비행기 타는 것도 큰일이고, 다른 언어를 하는 나라에 와 본다는 것 자체가 큰 경험이다. 물론 계속 다니다 보면 공항만큼 싫은 곳이 없고 뱅기 타는 것 역시 돈 내고 고문체험학습 하는 거 같을 수 있으나 처음 타보는 사람이 비디오 들고 찍는 거 가지고 혀 찰 필요는 없잖소. 너는 초보고 나는 고수인데, 너 하는 꼴을 보니까 참 유치하다는 식으로 남의 즐거움을 꼭 밟아야 하나. 먼 나라 나가는 건 돈도 많이 들고 시간 내기도 힘드니 평생 한두 번 할까 말까 일 수도 있는 만큼, 대강 유명한 곳만 들러서 사진만 찍고 간다고 비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 그러다가 또 여유가 생기면 더 돌아다니고, 그러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곳을 찾으면 그 땐 일주일, 한 달 시간 내서 갈 수도 있는 거지. 모든 분야의 고수가 될 수는 없고, 모든 지역을 다 방문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다 '제대로' 할 수는 없으니, 그냥 맛보기로 해보는 것까지 비하하진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덧:
물론 이건 내가 모르는 분야에서 괜히 기죽어서 손 놓아 버린 적이 많아서 하는 말이다. 내가 잘 하는 분야는 나도 좀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싶은 부심이 넘쳐나는...게 사람이죠 네. 냐하하하. 정통 패셔너블하게 옷 입는 방법은 몰라도 내가 개발자 패션은 좀 안다거나(개발자 패션 속성 과외 원하시면 저한테 연락하셈), 고급 요리는 몰라도 대강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애들 저녁을 싸고 빠르게 한다던가 (하지만 절대로 인스타에 올릴 비주얼은 안 됨 ㅜㅜ).
우리 너무 기죽지 말고 삽시다. 고수라고 뭐 첫날부터 고수였겠어요. 다 흑역사도 있고 그랬으니 발전한 거죠.
덧:
몇 년 전에는 생일마다 맥도널드 가서 맥모닝 먹었다. 그래, 나 맥모닝 좋아하는 여자다. 내 생일에 뭘 먹든 내 맘이다!! 오늘만은 욕하지 마라! 뭐 그런?
오늘도 내 생일이니까 내 맘대로 먹는다는 정신으로... 틈새라면 먹었다. 아 행복해라
매운 음식 좋아해요! 라면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