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4일
가나다의 이유로 ABC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원래 성향이 ABC를 안 하는 건데 그것을 합리화한 것이 가나다의 이유다.
그 반대인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드물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날씬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잘 안 먹는다 말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 이유로 안 먹을 게 아니라, 원래 체질이 잘 안 먹는 체질인 경우가 많다. 물론 여자의 경우는 살찌는 식생활 습관으로 태어나도 살찌는 것이 싫어 혹독한 다이어트를 하는 케이스가 꽤 있겠지만, 이건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본능으로 잘 안 먹고, 이성으로 합리화한 거다.
게으른 사람들은 '삶의 여유'를 찾곤 하는데 이건 진짜 삶의 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오랜 시간의 경험을 걸쳐 깨달아서 그를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게으르다 보니까 편하게 사는 것이 좋고, 그 편함 속의 만족함을 삶의 여유라고 부른다. 게으른 사람이 아무 여유 없이 치열한 경쟁을 추구하는 것은 흔하지 않다. 반대로, 원래 바쁜 거 좋아하고 경쟁 좋아하는 사람은 여유 있는 삶을 경멸하면서 짧은 인생 그딴 식으로 낭비하냐 따질지 모르지만 기본 이유는 '삶을 낭비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생겨먹은 게 그렇다 보니까 특정한 선택을 계속 하게 되고, 그걸 합리화하는 거다.
난 어릴 때부터 꾸미는 걸 잘 못 했다. 예쁘지도 않았고 남의 시선에 좀 둔한 편이라 이쁘게 봐주는지에 대한 반응도 무뎠다. 돈에도 똑같이 둔감하다. 그렇기 때문에 치장할 거리는 잘 찾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왜 치장을 안 하는가, 명품 가방 하나 정도는 장만 안 하는가란 질문을 대면하면 나름대로 이성적인 논리를 찾는다. 그건 비효율적이고, 돈 낭비고, 실제적인 이득도 없고 등등. 하지만 진짜 이유는 내 성향이 외면적인 치장이나 그에 따른 사회의 평가에 둔하기 때문에 안하는 거고, 뭐든지 논리적인 설명을 선호하는 성격이랑 겹쳐서 조목조목 반박해서 그렇다. 그리고 만약 명품이 중요한 동네에 살았더라면 (i.e. 한국에서 자랐더라면) 나도 별생각 없이 명품 몇 개 사서 들고 다녔을지 모른다. 이슬람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거의 이슬람교인이 되고 심히 가톨릭인 동네 태어난 사람은 거의가 가톨릭 교인이 되듯이.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들이 불쌍하다는 주위 여자들의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이것 역시, 본능이 앞서서 하는 말이다. 아이 좋아하는 여자는 아이를 낳고 완전 올인한다. 그리고 합리화한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이렇게 사랑하는 경험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와 다른 이들을 비난한다.
이에 비해서 난 이기적이다. 아이는 이쁘지만 난 출근 안 하면 두 주 넘지 않아 가둬놓은 짐승마냥 답답해한다. 그러므로 그게 내 성향이지만 나는 나름대로 합리화를 할 수 있다. 아이에 너무 올인하면 엄마에게도 안 좋고, 엄마도 커리어가 있는 게 좋고 등등. 변명은 여러 가지이고 실제 통계 조사로 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겠으나 기본은 '난 집에서 육아 올인이 싫어'이다.
이건 감정적인 결정에서 더 그렇다. 어떤 남자를 사귀는데 아직 미련이 있다고 하자. 이럴 땐 사귐 지속의 이득을 열심히 늘어놓는다. 이건 다 합리화다. 결국은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는 거다. 답정녀들이 그렇다고 욕먹지만 사실 우리 다 거의 그렇다. 어느 정도 체내화 된 '사회적 기준'에 따라서 '있어 보이는', 혹은 '더 잘 나갈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데, 그것을 주위에서 곧바로 인정해주면 기분 좋다. 그러면 역시 내 선택이 옳았고 나는 대단한 사람이고 뭐 등등의 기분 좋아지기 루틴이 가능하다. 전업주부의 경우 '집에서 아이를 봐주면 아이들이 확 달라진다'라는 사회 기준을 선택할 수 있겠다. 주위의 사람들이 비슷한 가치관을 추구하면 기분 좋고, 그중에서 내가 조금 더 뛰어난 엄마면 더 좋다. 내 가치관을 망가뜨리는 '직장맘'은, 내 주위 사람들이랑 같이 욕하는 상대로 좋다. 이럴 경우 그 '직장맘'이라는 반대 포스는 내 선택이 얼마나 옳은가를 보여주는 예가 되면 아주 좋다(반대로 직장맘 대 전업맘 케이스도 당연히 가능하다.).
결국은, 거의 타고난 성향대로 가고, 내가 자란 환경에서 주입시킨 가치관 중에서 내 맘에 드는 몇 개를 택해서 간다. 그리고는 그것을 합리화한다. 합리화하기가 쉽지 않으면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그룹을 찾아 '합리화 거리'를 더 찾는다(프로 게이머인데 주위에서는 그것을 무시할 경우 프로게이머 커뮤니티를 찾아서 왜 프로게이머의 삶이 좋은지의 이유 등등을 더 찾아 공부하여 내 선택을 더 쉽게 합리화 할 수 있게 한다든지.).
이래서 요즘엔 아집이 센 사람들도 이해한다. 내가 옳다고 우기는 사람도 그렇고, 예전 같으면 웃기다고 깔봤을 사람들도,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했을 거고 그 선택이 옳았다는 이유를 백 개는 댈 수 있을 거라 추측한다. 이들이 '언젠가는 진실을 알겠지'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살아보니까 산타클로스도 없지만 객관적인 가치관의 진실도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