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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May 26. 2018

아이를 낳는다는 것. 아쉬울 게 많아진다는 것

2016년 7월 24일

남에게 기대는 것을 약점으로 보는 현대 사회에서는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인연을 끊어버림으로 보복/시정한다. 진상? 인연 끊어. 

친구인데 자꾸 당신을 호구 취급하는가? 인연 끊어. 

남친이 바람 폈어? 헤어져. 부모가 진상? 연을 끊어.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을 비참해 한다. 친구가 그렇게 진상인데 왜 못 끊어? 걔 말고 친구 없어? 남친이 바람을 폈는데/연락을 안 하는데 왜 그렇게 매달려? 자신 없어? 부모가 그러는데 왜 매달려? 애정 결핍이야?

이런 질문에서 우리는 늘 "아냐! 안 아쉬워!! 지가 아쉬우면 아쉬웠지 왜 내가 아쉬워!"로 받아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사실 아이 낳기가 너무 무서웠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지면 그냥 짐 싸고 나가면 되니까. 누구에게 기댈 필요 없고, 아쉬울 일 없고, 그냥 그렇게 쉽게 끝낼 수 있으니까. 남편과 싸운 적도 없고 상당히 좋은 결혼 생활이었는데도, 어떤 객관적 지표로 봐도 내가 손해일 것 같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로 들어간다는 게 미친 듯이 두려웠다. 아이를 낳으면 행복하다고 하지만, 이쁘다고 하지만, 안 이쁘면? 안 행복하면? 거기다가 애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데 내가 실직하면? 남편과 헤어지면?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니면? 아이가 없으면 백배로 단순하고 어느 정도 계산 예측도 가능한 내 삶이, 아이가 생김으로서 내 삶의 통제력을 상실할까 무서웠다.     


그런데 낳고 나서 결론은?     

....통제 상실했다 ㅎㅎㅎ 이젠 직장이 더럽고 치사한 날이 와도 때려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남편이 직장 그만두고 뭐 딴 거 하겠다고 하면 그래!! 관둬!! 같은 호쾌한 대답은 이제 못 해줄 거다. 사이 안 좋아져도 이혼하기 더 힘들 거고, 그보다도 매달 들어가는 시간, 돈, 내 정신 건강.     


그리고, 그만큼 더 행복한가?     

모르겠다. 나는 내 몸은 무지 잘 챙기는 이기주의자라서, 내가 힘들 정도로는 안 한다. 아이 낳자는 결정도 이민 오고 나서 상당히 안정된 뒤에 결정한 일이었고, 여러 가지로 난 육아를 다른 사람보다 훨씬 쉽게 하고 있다. 아이들은 정말 예쁘다. I never knew I could love someone so much라고 어떤 남자가 쓴 글을 봤는데 - 나도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 줄 몰랐어 - 나도 그렇다. 첫날부터 모성애가 뿅 생긴 건 아니지만, 6년이 지난 지금 난 완전히 엄마가 되었다.  


뭐가 변했는가?     

훨씬 덜 교만해졌다. 전에는 인생의 상당 부분은 내가 통제 가능할 수 있다고 봤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만큼 대가 받는 거고,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안 하려면 내가 잘 나야 하는 거고 등등. 그런데 안 그런 시나리오도 정말 많더라. 아픈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가 뭘 잘못했겠지 라고 다들 생각하는 게, 운명을 자신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서 그런 거 안다. 난 내 관리 잘 할 거니까 이상한 (...) 애 안 태어날 거야 뭐 그런 교만함. 하지만 아이 낳고 키우다 보면 얼마나 아픈 아이들이 많은지, 얼마나 좋은 부모들이 애타하면서 아이를 돌보는지 보게 된다. 그 앞에서 '니가 잘못했으니까 애가 아프지'란 입찬소리는 안 나온다.    


그리고 사실 어린 애기들만큼 개진상에 나를 호구로 아는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도 계속 사랑해야 한다. 계속 돌봐야 하고, 그리고 그렇게 주고 주다 보면, 내가 손해 보는 관계인데도, 내가 이렇게 퍼붓는 사랑은 나중에 기억하지 못할 건데도 그래도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날이 오더라. 더 이상 끊어버릴 수 있는 결정권은 나에게 없고, 그저 매달려 끌려가는 완벽 을의 입장이 되었는데도 이뻐하고 감사한다. (솔직히 이게 딱히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 그리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통제하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큰 교만인지를 알게 되니까 주위 사람들이 더 보이더라. 둘째 낳느라 입원했을 때, 스무 살에 넷째 아이를 낳던 그 산모. 나이 꽤나 지긋한 남편이 아들 셋을 올망졸망 데리고 들어오는데, 행복해 보이더라. 안 행복할지도 모르지만, 전 같으면 이래저래 판단했겠으나 이젠 그냥 뭐 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거려니, 그렇게 행복을 찾는 거려니 하게 되더라.     


아이 낳기를 권장하느냐 하면 아니오. 너무 힘들어서, 그리고 너무 변수가 많아서 뭐라 조언하기가 힘들다. 아이를 안 낳았으면 후회했을까? 이걸 꼭 협박이라고 하던데 (늙어서 애 없으면 후회해!!), 낳고 나서 후회한 사람들도 엄청 많을 걸. 그래도 아이가 예쁘고,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살게 되고,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이 소중한 것에 투자하기도 하지만, 내가 시간과 정성을 투자한 것이 가치가 있다고도 믿게 되니까, 내가 그렇게 많이 희생하게 한 아이는 귀중할 수밖에.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의 단 하나 공통점이라면, 엄마 아빠가 있다는 거다. 종족 번식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후손을 남기다 보니까, 아이 낳고 예뻐하고 충성 다해 키우도록 뇌 회로 해킹하는 유전자는 분명히 있다. 그게 정말 도움이 된다. 글에서는 육아에 회의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내 새끼 안으면 눈앞이 하얘지도록 예쁘다. 자는 애들 옆에 두고 막 감동할 때도 많다. 내가 언제 누구를 이렇게 사랑할까 감탄하면서. 하지만 점점 소멸되어가는 내 공간과, 내 여유, 그리고 그와 함께 작아져가는 내 세계가 안타깝기도 하다.     


결론1: 

나에게는 상당히 중요하던 자유를 포기했다. 생각했던 것처럼 끔찍하지는 않다. 그러나 남들보고도 해라해라 하기는 쉽지 않다. 


결론2: 

애 낳기 전의 진상은 애 낳고 나서 진상 엄마가 되더라.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똑같이 변하지는 않더라는 얘기. 애 낳고 더 후줄근해지는 사람 있고, 더 외모에 신경 쓰는 사람 있고, 더 마음 약해지는 사람 있고, 더 편협해지는 사람 있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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