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11일
정말 여성상위 시대라면 -
김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 면접인가? 같은 여자 동기들은 다 취업이 되었는데 자신과 남자 동기들 몇 명은 취업이 안 된다.
여자 동기들은 그냥 서류만 내면 되지만, 남자들은 지난 3년 호르몬 검사 자료와 경찰 리포트 안 내면 서류 통과가 잘 안 된다. 가족 범죄력도 다 보고해야 한다. 김태진의 형은 성추행으로 입건된 경력이 있다. 여자 형제가 없는 것도 약점이다.
“이해하시죠? 남자분이 들어오면 아무래도 성추행의 위험도 있고, 같이 회식하기도 좀 그렇잖아요. 남자들 술 마시면 실수 많이 하시니까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네, 뭐 그러시겠죠. 하지만 통계 보시면 알겠지만, 성추행의 90%는 남자에요. 성폭행도 95%가 남자죠. 사내 성희롱도 말 할 거 없고요. 강력 범죄도 거의 다 남자인 거 아시죠? 그런데 회사 입장에서 남자분을 들이면, 아무래도 기존 사원분들이 불편한 점도 많아지고요…”
“아 정말!”
몇십 번, 몇백 번 들어온 말을 또 읊어대는 걸 듣자니 혈압이 확 올라서 실수해버렸다. 직원의 눈이 당장 싸늘해졌다.
“…지금 화내시는 거예요? 호르몬 검사 받으셨어요?”
그렇다. 남자들은 감정적이고 위험하다는 편견이 있다. 그래서 목소리만 높여도 당장 ‘분노 조절 못 해서 감정적이고 위험한 남자’로 찍힌다. 여자가 목소리 높이는 건 괜찮다. 여자들은 폭력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아무리 해봐야 혼자 속상해서 울거나 뒤에서 불평하지만, 남자들은 공격적으로 화를 내고 남을 위협하고 자기주장을 억지로 관철시키려 한다는 편견이 있다. 그래서 ‘공격적’이다 판단 받은 남자들은 나노 봇을 달고 다녀야 한다. 목소리 높이는 거, 운동 외에 맥박 빨라지는 것, 그리고 테스토스테론 수치까지 잰다. 중고등학교 때 싸움 몇 번 했다가 평생 취업 안 되는 애들 수두룩하다.
“화내는 거 아닙니다.”
김태진은 진정하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상대방 얼굴을 보아하니 이미 이번 면접은 물 건너갔다. 예상했듯이 직원은 성의 없이 단골 멘트를 읊었다.
“그리고 … 뭐 딱히 사고 치시지는 않더라도, 남자 성욕이 뭐 어딜 가는 것도 아니고 시한폭탄이죠.”
남자는 성욕을 컨트롤 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사회의 인식 때문에, 밤 아홉시 이후에 밖을 나가면 눈총이 뜨겁다. 여자를 2초 이상 쳐다봐도 안 된다. 인터넷에서 뭘 보는지 공개할 필요는 없지만, 공개하면 취업이 쉽다는 얘기도 있었다. 포르노를 본다는 게 들키면 끝이다.
“여자 친구는 있으세요? 결혼 하셨어요?”
시간 때우기용 질문을 아까보다도 더 성의 없이 내뱉었다. 김태진은 한숨을 내쉬고 싶어졌다.
그나마 사귀는 여자가 있으면 좀 덜 위험하다는 인정을 받는다. 사귀는 여자가 잘 나가면 잘 나갈수록, 그런 괜찮은 여자가 선택했다는 프리미엄이 붙어서 더 유리해진다. 그러나 그는 잘 나가는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할 정도로 비위는 좋지 않다.
실제로 성형을 받고 몸을 다듬는 데다 화술 과외까지 받아서 여자들과 사귀는 능력만 늘리는 남자들도 있다. 여초 사회에서 여자와 대화하는 방법을 모르면 퇴출이다.
[남자는 살 빼기도 쉽고 근육도 만들기 쉬운데, 살이 쪘다는 건, 뭐 다른 거 더 볼 필요도 없죠.]
[여자와 사귄 적이 없다면 뭐, 폭력적이거나, 섹스 잘 못 하거나, 성격 이상하거나 그렇겠죠?]
[생리도 안 하고 애도 안 낳고, 그런데 외모 관리도 못 하나요?]
이따위 여초 사회에서 살기 힘들다 한마디 하면 왕따다. 주위 남자들은 동조하는 척하다가 나중에 여자들에게 꼰지른다. "김태진 쟤… 몰랐는데 좀 위험한 거 같더라. 같은 남자지만, 그런 남자 보면 내가 다 여자들한테 미안해. 저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남자들이 그런 취급 받을 수밖에 없지…" 등등. 명예 여자 새끼들 때문에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눈치 봐야 한다.
사귀는 여자가 있었다. 그렇지만 짜증 나서 관뒀다. 여친이 딴 남자와 밤늦게까지 어울리는 건 괜찮지만 (여자는 더러운 생각 안 해!), 자신은 다른 여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너 범죄자냐?’ 소리를 들어야 했다. 저녁 아홉시 이후에는 집에 가야 했고, 인터넷 기록도 보자고 들었다. 곧바로 취업 되어서 돈을 벌던 여친은, ‘남자들도 취업 잘만 하는데, 니가 성격이 그렇게 남자 같으니까 안 되는 거야. 호르몬 약이라도 먹어’라고 막말했다. 물론 사회는 여친 편이었다. '당연히' 여자는 밤늦게 남자 만나도 괜찮고, '당연히' 여자를 쳐다보는 남자는 더러운 상상을 하는 예비 범죄자고, '당연히' 취업 안 되는 남자는 호르몬 약이라도 먹어야 한다. 같은 남자들도 '너 같이 팩트를 무시하는 애들 때문에 같은 남자들이 욕먹는 거야' 한다.
진짜 호르몬 칵테일을 먹을까? 그러면 분노가 좀 줄어들까? 취업 준비하는 남자들 꽤 많이 먹는다고 하던데?
다시 한번 고민했다. 테스토스테론을 줄여준다. 암내도 줄인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남자들을 위해 공짜로 나눠준다. 몇십 년 전에는 ‘화학 거세약’이라고 불렸던 호르몬 약의 변형이다. 아주 고분고분하고 여성스러운 남자로 만들어준다.
아냐. 내가 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남자다운 게 좋다고, 그런 남자가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육질에 마초스러운 남자는 딱 영화에서만 인기가 있다. 배역은 거의 다가 여자고, 눈요깃거리로 나오는 남자 말이다. 성기가 비인간적으로 크고, 몸은 머리와 수염만 빼고는 깨끗하게 제모한, 근육으로 덮였으나 요리를 잘하고 여자들이 좋아하는 소설 줄거리를 줄줄 외는 그런 남자들. 그러나 실생활에서 여자들이 원하는 남자는 말 잘 듣는 남자다. 감히 쳐다보지 않고, 말대꾸 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시키는 일 잘 하는 남자다.
초등학교 남자애들은 부산스럽고 지적능력이 여자아이들보다 떨어진다고 차분하게 만드는 약을 먹인다. 중학교 때부터는 변성기가 오면서 집중 감시를 당한다. 혹시 변태적인 성욕은 없나, 여자아이들에게 폭력적으로 대하는가, 쌈질을 하는가 등등. 조금이라도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면, 목소리를 높이면, 인터넷에서 키배질 하다가 걸리면 곧바로 경찰에 넘겨진다. 직장에서도 한 번만 성질내면 아웃이다. '폭력성'을 보인 위험한 남자니까.
드럽고 치사하다. 다음 생엔 여자로 태어나서 내 맘대로 살고 싶다.
남성적으로 판단되는 특성으로 취업이 힘들고, 실생활에서 차별받고, 사회 전체에서 그 특성이 열등함으로 받아들여지고, 일상생활에 제한이 가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님을 먼저 증명해야 인정받는 그런 분위기라면 여성상위시대 인정. 여성전용칸 뭐 그딴 거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