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일
아래에 "딸 바보 아빠로서 페미니즘은 몰라도 메갈은 해가 된다"고 하시는 댓글 보고 -
당신은 사실 전라도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전라도 사투리를 쓰지 않음으로써 전라도 사람 아닌 척한다고 하자. 그런데 당신 지도교수가 "전라도 놈 싫어"라고 한다. 물론 그냥 한 사람의 의견이다. 하지만 학교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그런 교수의 발언에 몇 사람이 동의하고, 당신은 전라도인으로서 뭐라 반박하기가 힘들다면 이미 이건 개인 레벨을 넘어섰다. 정부 고위직의 사람이 "이래서 전라도 놈이랑 일 못 하겠어"해도 안 잘릴 정도면 이미 이건 개인 레벨의 편견에서 사회적 동의로 받아들여지는 임계점을 넘은 거다. 다른 사람들도 쉽게 전라도 비하 발언을 할 수 있게 되고, 당신은 전라도인으로 싸우기가 힘들어진다.
(이젠 죽었지만 -_-) 메갈을 보자. 메갈이 한국 남자와 싸우려고 시작한 거 같은 해석을 많이 보는데 그거 아니라고 생각한다. 메갈은 여자를 위한 사이트였고, 여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다. 여자가 치마를 입은 것이 당신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듯이, 메갈의 욕설은 당신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메갈의 방식으로는 남자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게 포인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상도 사람들로 가득한 팀에서, 전라도 출신이지만 아닌 척하고, 전라도 비하 발언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한 당신에게, 메갈은 미친 척하고 상사에게 야이 경상도 ㅅㅂ놈아 너 뭐라 그랬어? 라고 덤빈 전라도 선배다. 전라도 비하 발언할 때 경상도 비하 발언을 아주 찰지게 욕 섞어 해준 동료다. 물론 전라도 비하에 경상도 비하로 답하는 건 옳지 않다. 그 실성한 선배는 경상도 사람들이 절대 참지 못할 정도의 심한 쌍욕을 했을 수도 있고, 경상도 출신 위인에게 모욕을 가했을 수 있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의 큰 반발을 샀을 수 있다. 하지만 경상도인들을 설득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욕먹어온 전라도인들에게 외친 거다. 야, 덤벼. 덤벼도 돼. 너 지금까지 당한 거 차별이고, 부당한 거야. 내가 미친놈처럼 싸워줄 테니까, 너는 곱게 반대해도 돼(참고로 난 부모님 두 분 다 경상도 분이다. 나 부산에서 어릴 적 살아서 사투리 구사 가능자다.)
그렇지만 같은 전라도 사람도 그 선배를 욕할 수 있다. 너 같은 놈 때문에 전라도 사람들이 더 욕먹는다. (맞는 말이다), 혐오에 혐오로 대하면 안 된다고 말 할 수 있다(역시 맞는 말이다). 그렇게 덤빔으로서 오히려 전라도 사람들에게 더 해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럼, 그 차별을 계속 참을 거야? 견딜 거야? 전라디언 어쩌고 할 때마다 허허 웃고 넘어갈 거야? 지도교수님에게 가서 정중하게 저기요, 제가 좀 예민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참 좀 그렇거든요... 할 거야? 그래서 통해?
그렇게 정신 나간 놈처럼 덤빈 몇 명 덕분에, 지역감정이 이슈화되었다(라고 하지만 결국은 전라도 사람들 차별). 경상도 사람들이 이젠 전라...어쩌고 하기 전에 아주 조금이라도 눈치를 본다. 물론 '역시 또라이 전라도'라고 비아냥거리면서 그렇게 난리 쳐 봤자 너희에게 도움 안 된다 하는 이들도 있지만, 당신은 이제 배웠다. 눈이 뜨였다. 내 편도 있구나. 나만 당하는 거 아니었구나. 그 많은 전라도 편견 발언, 뒤집어서 경상도에 적용하니까 말이 안 되는 건데 그걸 나마저 믿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 미친 선배와 동료 덕에, 당신이 "그 선배는 물론 너무 나갔지만, 전라도 사람들 비하가 넘쳐나는 건 사실이죠"란 말을 점잖게 하면, 이전보다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물론 "지역감정은 다 옳지 않아요! 우리 다 친하게 지내요!"라는 경상도인들 많지만;; 전라도 사람들 신나게 깔 때는 같이 웃어놓고 이제 와서 정색하고 "전라도 비하가 문제가 아니라 혐오가 문제입니다!" 이러고 있지만 뭐 어쨌든.
미시경제가 있고 거시경제가 있다. 과소비는 개인 레벨로 좋지 않고 저금을 해야 하지만 국민 전체가 다 소비를 그만두면 경제는 망한다. 미시 레벨에서 옳다고 거시 레벨도 옳다는 게 아니다. '임계점'이 있다. 사회 전반으로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개인의 편견은 사회 전체의 힘을 업고 엄청난 권력으로 변한다. 내가 아래에 '남자가 여자를 열등하게 봐서 무시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봐서이다'라고 썼는데, 그게 개인 레벨에선 그렇다. 하지만 미시레벨에서 남자가 느끼는 연애 좌절을 가지고 거시레벨로 여자들 전체가 당하는 여혐을 정당화하면 안 되지.
해외 몇 나라에서 왜 혐오 발언을 처벌하냐면, 미시레벨에서 헛소리하는 걸 막아야 거시레벨로 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거시레벨로 퍼져서 제도화되어 있다면 미시 레벨에서까지 제제를 가해야 변화 임계점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좀 백신 같아서, 그 크리티컬 임계점을 넘어서면 사회에서 "그딴 발언하는 놈이 사람이냐" 분위기가 조성되고 자정이 된다. 하지만 백신 퍼센티지가 떨어지면 혐오가 또 퍼진다. 허핑턴에서 "내가 한남충이다"라는 글 읽었는데, 나도 미시 레벨에서 남자의 좌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미 거시 레벨에서 너무나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난무한 상태에서 그런 남자들 이해해주자는 아니라고 본다.
만약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인에게 3일에 한 명씩 맞아 죽는다면, 당신은 전라도인으로서 가만있겠는가? '전라도 애들이 좀 성질 돋우는 거 알잖아요, 그래서 팼어요'라는 핑계가 사회적으로 먹힌다면, 당신은 그게 옳다고 생각하나? "전라도 새끼가 나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아무런 상관없는 전라도 사람을 죽인 경상도인은 조현병 환자니까 지역감정으로 몰아가지 말라고 할 것인가?
전라도인 성기에 전구를 넣고 깨자는 농담이 인터넷에 버젓이 돌아다니면? 전라도인이 경상도인에게 당하는 폭력이 수십 배로 더 높다면, 한국 CEO와 임원의 95%가 경상도인이라면, 국회의원 중에 전라도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면, "전라도인은 고용하며 좀 그렇더라고"란 의견이 아무런 제재 없이 게재된다면, '전라도 사람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취업도 어렵고 진급이 잘 안 되고 그나마 잘리기도 쉽다면, 경상도 주도로 이렇게 경제 발전이 되었는데 그거 이득 보면서 뭔 말이 많냐,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니까 그저 경상도 사람이 일 더 잘하고 믿을 만해서 고용한다고 말하면?
이 와중에서 실제로 범죄를 지르지는 않았어도 "경상도 새끼들 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과격한 글을 올리는 소수의 이들이 있다면, 당신은 전라도 차별 없애기보다 그 경상도 혐오자들부터 색출해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나? 삼일에 한 번씩 전라도인이 경상도인에게 살해당하고 있는데?
물론 지역감정은 다 좋지 않습니다. 혐오는 옳지 않지요. 경상도인으로서 그렇게 과격한 전라도 사람 보면 없던 지역감정도 생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