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Dec 31. 2017

비행기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2016년 10월 22일

고등학교 때 성추행을 당했다. 교복 입고 영화관에 간 날이었다. 낮이었다. 어떤 남자가 옆에 와서 앉더니 슬슬 허벅지를 만졌다. 너무 놀라서 얼어붙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겁 많고 그런 스타일은 아닌데 어쨌든 그땐 그랬다. 그 남자가 몇 번째로 내 허벅지를 쓸었을 때인지 모르겠는데 일어나서 자리를 옮겼다. 그 남자가 나를 따라왔다. 나는 일어서서 영화관을 나왔다. 그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뭐 아주 크게 트라우마가 남고 그런 거 아니었는데, 그 후로 상당히 오래 생각을 했다. 난 그때 왜 가만히 있었지? 뭐가 제일 좋은 대응방법이었을까? 


약 이십 년 이 지나서, 몇 시간 전 비행기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비행기 탄 게 몇 번째인지 세 본 적 없으나 얼추 세 자리 숫자 가까이 될 거 같은데 성추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앉을 때부터 좀 심상찮았다. 덩치 큰 남자는 얼굴은 바깥 창문을 내다보면서 킁킁, 쿨럭, 큿, 으핫, 뭐 이런 기묘한 소리를 내 댔다. 난 최대한 눈 안 마주치려고 무시하고 앉았다. 내 왼쪽에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앉았다. 오른쪽 남자는 열심히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키는 190에 가까웠고 몸무게도 백 킬로는 족히 넘을 덩치였다. 난 절대 얼굴을 그쪽으로 안 돌리고 버텼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20분 정도가 지나서 그 남자는 재킷으로 얼굴을 덮었다. 킁킁거리는 소리는 계속됐다. 자는 모양이라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 남자의 손이 쑥 나오더니 내 허벅지를 덮었다. 난 진짜 백퍼 반사 신경으로 그 남자의 손을 찰싹 때리고 밀어냈다. 닿자마자 그랬다. 이 남자는 재킷을 얼굴에 덮어쓴 채로 꿍얼꿍얼하더니 아까까지의 자세로 돌아갔다. 뭐 딱히 화나거나 당황한 건 아니라고 그땐 생각했다. 난 잠깐 고민했다. 승무원 불러서 지랄할까? 그런데 사실 좀 모자란 사람인 것 같기도 해서 몇 초를 더 기다렸다(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남편과 얘기하면서야 내가 그때 당황해서 제대로 생각을 못 했음을 깨달았다). 한 1~2분이 지나니까 짜증이 났다. 난 이제부터 이 남자가 진짜 추행을 목적으로 그런 건지, 또 그럴 건지를 걱정하면서 남은 한 시간 반을 안절부절못해야 하나 고심했다. 그러나 나는 회복이 빠른 뇨자. 고딩 땐 꼼짝 못 하고 당했는데 이번엔 반사적으로 쳐냈음이 자랑스러웠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중에 이 남자가 자세를 바꾸는 척하면서 (안 그래도 쩍벌이었던) 다리를 더 벌리며 내 무릎에 닿았다. 난 반사적으로 다리를 꼬면서 피했다. 자, 이것도 어중간하다.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다리 부딪히는 건 흔하다. 그거 가지고 난리 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몇 분 후 이 남자는 더 쩍 벌리면서 내 무릎에 닿을 정도까지 다리를 크게 벌렸다. 난 또 피했다. 그리고 몇 분 더 지나고 이 남자는 몸을 틀어 누우며 아예 내 좌석 구역 반 정도까지 세게 밀며 들어왔다. 난 사진을 찍고 승무원을 불러 자리를 바꿔 달라고 했다. 이 남자는 이 때도 자는 척했다.     

자리를 바꿔서 잘 왔다. 내리면서도 또 보고했다.


집에 와서 남편과 같이 얘기하며(이럴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는 거 안다) 깨달은 건데. 보통 영국/스웨덴 남자였으면(기억하기로는 백인이었다), 내가 그렇게 세게 쳐냈을 때 안 깼을 리가 없다. 당장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하는 게 맞다. 와, 그게 당연한데 난 그땐 그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난 내 왼쪽에 있던 다른 아저씨에게 증인 서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고(처음 손이 닿았을 때는 주무시고 계셨다), 더 난리를 칠 수도 있었다. 좀 모자란 사람이라고, 별거 아니라고 합리화하려 했지만 이 사람 멀쩡하게 비행기를 탔고 문자 보내고 하던 사람이다. 모르는 여자 허벅지를 슥 잡고, 그 자리에 다리를 마구 밀어 넣는 게 괜찮다고 믿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고딩 때보단 나아졌다. 무섭진 않았고, 그때 그 상황에서는 그리 당황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의 내 머리 회전 레벨은 아니었다. 그 일이 발생하고 몇 시간 동안이나 그랬다. 난 그 가득 찬 비행기에서 소란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나마 내 차림 때문에 이놈이 만만하다고 봤나 했다. (궁금하시다면 - 치렝스에 롱부츠 신고 있었다. 긴 팔 스웨터에 머리는 질끈 묵고 안경, 노 메이크업이었다). 남편에게 그 남자의 쩍벌, 그리고 다리를 들이밀던 사진을 보여주니 이건 더 말할 거 없이 고의고 성추행 맞다고 했다. 순간 다행이라고 느꼈다. 내가 이런 거 가지고 거짓말할 사람 아니라는 걸 남편이 알고, 나에게 너 오버라고 말할 리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남자가, 남편이 그렇게 말해 주어서 안심이 되었다. 경찰에 신고한다면 어떨까 고민했다. 이런 신고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는 게 도움이 되겠지 싶었다. 트럼프라면 이 년 얼굴 봐라, 얘를 누가 건드리겠나 하겠지. 그래도 적당히 그럴듯한 학벌과 직장이 고발할 때 도움이 되겠지. 만약 동구권 출신으로 런던에서 청소일하는 여자, 탈색 금발에 짧은 치마 입고 있는 여자라면 덜 믿어줬을지도 모르지. 이런 생각하는 내가 정말 싫다.     


자. 지금까지 내 페이지에서 내 글을 쭉 보아 온 사람들도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나?? 여혐 글 맨날 올리다가 자기도 당했다는 식으로 소설 쓰는 거 아냐? 라고 의심이 될 수 있겠다. 사건 자체는 옆자리 남자가 내 허벅지를 만지다가 내가 쳐낸 후 계속 다리를 들이밀며 괴롭힌 건데, 내 인생만 불쾌해졌고 나만 고민이 많아졌고 나만 이래저래 평가의 시선을 받게 된다. 거지같다.     

사진 올립니다. 앞 좌석을 봐주세요. 이 남자 다리가 제 자리 어디까지 들어왔는지. 사진 주작 얘기 나올까 봐 더하자면 발치에 있는 자주색 가방이 제 유니폼 가방입니다. 마소 컴퍼니 스토어에서 사서 로고 보여요.


처음 쩍벌
 왼쪽 아저씨. 역시 키 크고 다리가 길어서 불편하지만 쩍벌은 하지 않는다.
자리 바꾸기 시작
밀고 들어오기 시작


매거진의 이전글 나쁜 아빠 되기 힘들다는 글이 남성혐오적이라는 댓글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