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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Dec 31. 2017

맨스플레인에 관하여

2016년 10월 22일

페미니즘 관련 이슈 중에서 내 입장이 어정쩡한 부분 중 하나가 아마 맨스플레인이지 싶다. 이게 없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여자니까 잘 모르겠지 얕잡아 보고 설명해주는 친절한 오빠들 많다. 이건 한국 남자뿐만이 아니라 그냥 내가 겪은 거의 모든 인종의 남자들의 버릇이었다. 이번 출장에서도 맨스플레인 두 시간 당했다. 냐하하. 나름 극한직업.     

그렇지만. 정말 많은 남자들과 일한 경험으로 보면, 이건 내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대외 설명충이 남자들이 많다. 눈치 없어서 지가 지금 입을 열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닌지 파악 못 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지 얘기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은 남자 비율이 훨씬 높다. 그렇지만 이걸 남자병이라고 하기 힘든 것이.. 

    

내 신조어 하나 만들었다. "맘스플레인". 이거 여자라면 엄청 들어봤을걸. "네가 애를 안 낳아서...", "네가 결혼을 안 해서...","애 낳고 키우다 보면 너도 이해할 거야..." 그렇다. 여자들도 오지게 설교한다. 당장 나부터도 이 블로그에서 이렇게 전문 설명충으로 글 쓰고 있지 않은가 (...). 아주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이 만만하고 내가 아는 게 좀 더 있다 싶으면 자기 자랑과 합리화가 듬뿍 뿌려진 설교 기술을 시전한다. 단지 이름이 달라진다. 나이 많은 사람이 그러는 건 꼰대짓. 여자들이 그러는 건 오지랖. 나이 어린 사람들이 그러는 건 중2병.     


그런데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면, 남자는 불특정 다수 앞, 모르는 사람, 공공장소에서도 좀 더 근자감 가지고 시전한다는 점? 그리고 상대가 여자일 때 "오빠가 말이야...",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식의 방식을 택한다는 거 정도? 한국 사람들의 특징이라면 나이 기반의 꼰대 짓이 해외보다 훨씬 더 심하다는 것. 그리고 친밀한 사이에서의 설교질은 여자가 좀 더 끈질기고 개인 공격적이다. 내가 겪은 남자들은 오히려 1:1 관계나 가족 관계, 친구 관계 등등에서 그리 심하지 않았다. 이걸 상당한 영토 침해로 보기도 한다. 위아래가 확실하기 때문에, 아랫사람에게는 오지게 설교해대지만, 자기보다 위로 보는 사람, 혹은 동등한 관계라면 훨씬 더 조심한다. 여자는 이런 관계에서 조심 덜 하더라. 그러니 자기보다 아래로 보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설교력 폭발. 살림 이렇게 해라 이런 남자 만나라는 엄마가 그렇고 이렇게 꾸며라 저런 옷 입어라는 이모가 그렇고 네 남친 별로다 직장 생활 이렇게 해라는 아는 언니가 그렇고 인사 좀 똑바로 해라 너 웬 싸가지냐는 선배 언니가 그렇고 여자애가 왜 그렇게 싹싹하지 못하냐는 고모가 그렇고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그런 옷 입고 다닌다는 할머니가 그렇고 - 결혼하면 이해한다는 결혼한 친구, 니가 연애 안 해봐서 모른다는 연애해 본 친구, 너는 결혼해서 이해 못한다는 결혼 안 한 친구, 네가 회사 안 다녀봐서 사회생활 이해 못 한다는 직장 다니는 친구, 너는 견문이 좁다고 타박하는 여행 좀 해본 친구, 조기 교육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학부모 친구 등등 오지라퍼들은 많다. 지나가는 (찜질방, 옷가게, 버스에서 만난) 아줌마들 오지라퍼도 무지 많다. 이 사람들은 남자에게는 좀 덜하지만, 그래도 나이 어리거나 만만하거나 친하다 싶으면 스킬력 폭발한다. 뭐 따지자면 일면식도 없는데 방문자 성별, 나이 구분 안 되는 페이지에서 오지게 설명해대는 나 같은 여자도 있다 (...).     


그래서. 맨스플레인이 순수히 여자들의 피해의식의 산물이냐 하면 아뇨. 당장 나도 아주 자주 겪는 일이다. 이게 내가 여자라서 당하는 피해인가 물어보면, 뭐 내가 여자라서 그 특정한 톤을 띄고 나한테 설명해대는 건 맞긴 한데, 보통 그런 남자들은 태생이 내추럴 본 설명충이라 딴 남자들에게도 비슷하게 대한다. 그저 말투 패턴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 사람은 남자들만 모인 미팅에서도 혼자 독백하다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딴 사람들 때문에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가 없다며 헛소리해댈 거고, 자기보다 경험이 좀 적은 주니어 개발자(남자)가 걸리면 아싸 오늘 날이다 싶어서 자리 펴고 각잡고 하루 내내 떠들 거다. 순수 이공계 사람이라면 사실 위아래도 별로 없어서 상급자에게도 이 스킬을 시전한다. 여자라서 나름 조금 더 젠틀하게, 친절하게 설명한답시고 하면 "오빠가 설명해줄게"가 되는 거고, 열 받아서 인신공격으로 들어가면 "이 여자가 뭘 안다고", "이 아줌마가 진짜"로 나가는 거다.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경력도 없는 게 어디서"로 발현되었을 거다. 친절하게 하려면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러는데 형이 설명해줄게"였을 거고.     


결론. 

맨스플레인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건 여자를 억압하려는 남자들만의 극악한 스킬...보다는, 남녀불문하고 존재하는 설명충, 오지라퍼들의 여러 가지 패턴 중에 남자가 화자이고 여자가 청자일 때 주로 나타나는 패턴이며, 남녀 관계 다이내믹을 배제한 다른 패턴도 많다는 것이 내 의견. 여자도 남자만큼이나, 아니 가까운 관계에서는 훨씬 더 설교한다.     

앗. 그리고 마지막으로 - 남자들이 맨스플레인을 부정하는 이유는 남자인 자신에게도 설교해대는 다른 남자들을 무지막지하게 겪어서일 듯. 어디 가나 꼭 그런 꼴통 하나 있다. 노관심인데 말 길어지는 매니저. 회식자리에서 안물안궁 지 얘기 십 분씩 하는 동료. 조언 안 구했는데 지 아는 거 오늘 다 구술하겠다는 자세로 줄줄이 늘어놓는 잘난 척 동료. 지가 이해 못 해놓고 한 시간째 횡설수설하는 보스님. 지도 뭐 하나 모르면서 딴에 삶은 이래 살아라 하는 아는 형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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