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Dec 31. 2017

남편이 바람피웠을 때 부인을 닦달하지 맙시다

2016년 12월 1일

남편이 바람피웠을 때 부인보고 왜 이혼 안 하냐고 닦달하지 맙시다.  


당신이 약간 특이한 전공의 전문의를 노리고 있다고 하자. 한국에서 경험 쌓을 수 있는 곳 별로 없는데, 마침 최고 교수 밑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그 병원에 일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몇 년은 일할 계획이라 근처에 집도 사고 인테리어도/이사 마치고 출근 시작했다. 아주 보람차게 일하면서 1-2년 지났는데...     

회식 자리에서 어떤 망할 놈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 썩을 놈은 당신의 상관이었다.     

병원에 고발해봐야 별 도움 안 될 것 알고 있다. 이놈은 교수의 최측근이다.     

얼굴 보기도 힘들다. 토할 것 같다. 출근 못 하겠다.     

그런데 이놈은 미안한 마음도 없고 오히려 능청스럽게 더 작업 걸어온다. 신고 안 하니까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안다.     

이직은 불가능하다. 아아아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 다 버리고 그냥 일반의로 돌아가거나, [완전 오지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갈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병원보다 훨씬 못하다.     

주위에서 다 알게 됐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보고만 욕한다.  

   

"돈 버는 게 그렇게 중요하냐?" 

"나 같으면 그냥 내 자존심 지키고 관둔다. 그렇게 비굴하게 붙어 있고 싶냐."

"사실 치마 입고 화장하는 꼴이 좀 남자들 꼬일 것 같더라." 

"당장 안 나가는 거 보니까 눈 맞은 거 아니야?"     


자자자. 여기서 스톱해보자.     

**************왜 나보고 욕해 이 나쁜 인간들아!!! ******************     

...라고 욕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래, 더럽고 치사하지만 일반의도 나쁘지는 않다.     

************ 근데 왜 내가!!! 저놈한테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데!!! 왜 내가 손해 봐야 돼!!!??? *****************     

직장 옮기면 어렵게 구한 집도 세주거나 팔아야 한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거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까다롭다. 직장 사람들은 옮길 수도 있는데 뭘 그리 붙어 있으려고 하냐고, 사실 그 남자가 좋았던 건 아니냐 슬쩍 묻는다.     

********** 아아아아아악!!! 왜 그 새끼 땜에 내가 고생해야 되냐고!!??? 왜왜왜왜?? 왜?? **************     

아니 진짜 내가 왜??     

그놈이 그 짓만 안 했더라도 난 룰루랄라 재밌게 직장 다녔을 텐데, 왜 그 새끼는 내 인생을 이렇게 꼬아놓느냐고??     

여기서 직장 관두지 않는 것이, 이 남자에 대한 미련이라고 생각하나? 설마. 자존심이 없는 건가? 비굴한 건가?     

뭘 원하냐고 묻는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걸 바람피운 남편 상황에 비교하면, 결혼 자체가 직장이고, 성추행한 놈은 "바람"이다. 성 추행한 직장 (혹은 바람난 남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거지같은 해프닝 (바람) 때문에 내 인생이 박살난 것이 짜증나고 미치도록 열 받는 것(실제로 남편을 아주 사랑했다면 정신적 충격은 몇십 배로 커진다). 근데 주위에서는 "여자가 잘 했으면 남자가 바람났겠나" 하거나, "자존심 있으면 이혼해라"고 한다.     

이사 한 번 하는 것도, 아니 물건 반품하는 것조차 일이 얼마나 많고 귀찮은데, 이혼하려면 얼마나 일이 많은지 아시는가? 전업이라면 직장을 찾아야겠고, 직장이 있다 하더라도 재산 분할부터 시작해서 애들은 어쩌며 백만 다섯 가지 리스트는 언제 다 해결하고 당장 겁나게 열 받은 내 멘탈은 어쩌고 하여튼 좋지 않다.

     

근데 이게 내 잘못이야?? 아니잖소. 근데 왜 손해는 내가 다 봐야 함?? 이직해도 손해고, 붙어 있어도 손해. 이건 진짜 내 잘못 아닌 추행 때문에 나만 억울해지고 나만 힘들어지고 나만 불편해진 상황인데, 추행한 놈은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혹은 "너도 좀 잘못했잖아" 이러고 있고, 주위 사람들도 수군수군. 내가 생각했던 미래는 이미 개박살나고 없는데 위로해주는 놈 하나 없고 다들 "존심 있으면 사표 내라" 이런다면?     

이 상황에서 나에게 이득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세팅은.     


1) 원래 관두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2) 성추행 처벌이 엄청나게 강력한 곳이고 

3) 그러므로 이놈 왕창 망신 주고 돈도 합의금 엄청나게 받아서 어차피 옮기려 했던 병원으로 룰루랄라 옮길 수 있다


...는 세팅인데, 말로만 들어도 소설 같고 실제 소설이다. 남자가 바람피워서 이혼했을 때 정말 이득만 짱짱 볼 수 있는 여자도 역시 거의 없다. 여기에서 예외는 친정에 돈이 엄청나게 많았고 어떻게든 남편 떼어 내려고 했었고 아이들한테도 아빠가 아예 전혀 네버 없는 쪽이 낫고, 금전적으로나 멘탈로나 사회적으로나 이혼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될 때 얘기임. 당연히 거의 없다.     


그러니까 최소한 여자들끼리라도 "바람난 남편을 어떻게 데리고 사냐 비굴하다" 이런 소리 하지 말자. 자기도 좀 분하고 좀 열 받고 좀 죽고 싶을까. 주위의 손가락질이나 구박 아니라도 충분히 힘드니까 도움이 될망정 피해자 닦달은 지양 요망.     


매거진의 이전글 종족번식의 비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