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2일
내 남편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당신은 페미니스트냐? 라고 물으면 불편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할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가사를 분담하며 생색낸 적 없고, 아이는 나보다 훨씬 더 잘 돌보며, 장 보고 냉장고에 뭐를 먹어야 하는지 살펴서 요리하고 애들 먹이고 뒷정리까지 다 한다(설거지뿐만이 아니라 부엌 정리도 나보다 더 깔끔하게!). 내가 빨래 개고 청소하는데 혼자서 처자빠져 TV 보지 않는다. 물론 나도 남편이 애들 밥해서 먹이는데 "어머 나를 이렇게 사랑해서 이만큼이나 해줘요 뀨뀨 난 누워서 폰이나 볼래" 하지 않는다. 성인 둘이 애 둘 키우고 같이 살면서 "넌 날 사랑하니까 날 위해서 이 정도 해줘" 이런 응석 부릴 여유는 없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가 페북에 무슨 글을 쓰는지 큰 관심 없는 사람이다. 여권 신장에도 별 관심 없다.
그렇지만 여성 동료에게 누군가가 성희롱성 발언을 한다면 곧바로 제지하거나 인사과에 고발할 것이고, 누군가가 여자라고 해서 능력 없을 거라 넘겨짚지 않는다. 예쁜 여자에게 더 친절하지 않고, 못생긴 여자라고 나쁘게 대하는 행동 역시 못 봤다.
남편은 내가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거 알면 상당히 불편해할 사람이다. 사실 남아공 마초 문화에서 커서, 남녀 성역할 구분에도 더 익숙한 면도 있다. 전기기사 자격증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집안의 전기나 하드웨어 문제는 남편 전담이고, 이것저것 고장난 건 자기가 고친다. 난 빨래 전담이고 청소 도우미 구하는 것, 애들 학교 관련 일을 좀 더 맡아서 한다.
하지만 결혼 첫 십 년 넘게 내가 가방끈 더 길어도 전혀 신경 안 썼고,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더 벌었을 때도 개의치 않았다. 애가 아프면 내가 재택 할 때가 좀 더 많긴 하지만 남편도 거의 비등하게 책임을 진다. 자기 커리어만큼 내 커리어도 존중해줬다. 같이 석사 공부할 때도 그랬다. 그만큼 남자라서 자기가 더 하는 일도 없고, 여자라고 나에게 떠맡기는 일도 없다. 나는 며느리라는 역할 때문에 시댁에 감정노동을 떠맡지 않고, 남편에게도 사위라는 역할을 이유로 내 부모님에게 잘해라, 한국말을 배워라 하지 않는다. 효도는 셀프.
남편은 로맨틱 마초 이런 사람도 아니다. 내 여자 내가 책임지겠다 이런 것도 없다. 성인 둘이 같이 살면서 같이 벌고 같이 일 나눠서 하면서 같이 아이 키운다는 주의다. 오빠 믿고 따라와, 걱정하지마 이딴 거 없다. 나도 바라지 않는다. "날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줘" 이런 건 우리 둘 다 1그램도 없다. 둘째 만두가 한참 잠 안 자고 칭얼거릴 때, 내가 하룻밤 못 잤으면 그 다음날은 남편, 그 다음은 또 나, 이렇게 번갈아가며 돌봤다. 상대방에게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줘"란 기대를 없애버리고 그냥 서로 존중하는 동거인으로 보면 많은 것이 단순해진다.
남편은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여혐 문화를 비판하는 발언도 별로 없다. 하지만 결혼 15년 동안 이 사람은 나를 한결같이 동등한 사람, 파트너로 대해줬고, 나 역시 여섯 살 많은 남편에게 오빠라고, 남자라고 기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성차별에 대해 사이다 글을 쓰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남편은 매일 나에게 사람으로 존중해 줬고, 여자가 아닌 그냥 사회의 한 성인으로서 살 수 있는 삶을 만들어주었다.
한 남자가 좀 여혐스러운 발언을 했다고 해서 손가락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환경의 산물이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여혐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난 아직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천천히 변하고 있고, 다들 평생 여혐 사회에서 살아와서 DNA 레벨까지 물들다 보니 생각 없이 말 나올 때도 분명히 있다. 말, 단어 하나하나 지적하고 고쳐나가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삶을 같이하는 이에 대한 존중이 있다면 꼭 "너 페미니스트라고 말해! 싫어? 너 여혐러야?"라고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자에게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강요하진 않는다.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여자, 혹은 사냥감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 존중해주고, 그게 힘들면 성추행 성희롱하지 말고, 안 사귀어준다고 모욕하지 말고, 열 받는다고 폭행하지 말고, 여자라고 직장에서 차별하지 말고, 그 외 나와 상관없는 여자들의 소비 습관이나 옷차림, 남자 취향에 고나리질 안 해주기만 해도 된다. 말 한마디 잘못한 거 가지고 꼬투리 잡고 여혐이라고 난리 ㅈㄹ 부루스를 추는 게 아니다. 동등한 사람이 아닌 성적인 도구로, 만만한 화풀이 상대로 보여지면서 당한 수많은 과거의 상처가 그 말로 또 딱지가 벗겨져서 그렇다.
내 남편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 한 적이 없지만, 그런 선언을 받아낼 필요가 없게 해 주었다. 이건 내가 예뻐서 잘 해주는 게 아니고(말했잖아. 나 별로 안 이쁘다고;; ), 날 너무나 사랑해서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보통 남자라 그렇다. 다른 여자와 결혼했어도 그랬을 남자이고, 실제로 내 주위의 남자들도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늘 감사하고 산다. 당연한데, 그래도 감사하다. 한결같이 사람 취급받는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편인지 잘 알아서.
사족1:
한국말 "오빠"는 아프리칸스의 "오우파"와 발음이 아주 비슷한데 Oupa 는 할아버지다 (...) 한국 여자들이 "오빠"라고 하는 거 보면 아니 이 무슨 족보 씹어 먹은 소아성애냐란 생각 든다고 싫어한다.
사족2:
비슷한 단어 또 다른 거 - 떡볶이. 한국에서 "떡볶이"를 먹는다고 하니 "오호? 한국에서도 떡볶이라고 불러?" 했다. Tokbokkie. 똑보끼. 사슴 종류 중 하나다.
사족3:
남편에게 페미니스트란 60년대에 브라 태우던 이상한 사람들, 혹은 남자를 다 죽이고 싶어 하는 무서운 여자들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이미지가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사회 정치면은 별로 안 읽는 남편이라 (...) 사실 나도 지난 5~10년 동안에야 겨우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대한 편견이 많이 옅어졌다고 느낀다.
사족4:
이 글 올리고 나서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양파: "Are you a feminist?"
남편: (-- ) ( --) .... "Who's as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