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Dec 31. 2017

딜 브레이커와 트럼프 당선의 의미

2016년 11월 11일

Deal-breaker라는 단어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다...라며 포기하게 하는 무언가를 가리킨다. 한국 정치를 모르는 나에게 박근혜 씨의 deal-breaker는 독재자의 딸이다라는 거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괜찮았으니 당선이 되었을 것이다(오히려 그 덕을 보았기도 했다). 나는 안철수 씨에 대해서 거의 잘 모르지만, 만약 안철수 씨가 "개발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건 헝그리 정신입니다" 이런 소리를 했다면 나에겐 deal-breaker 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deal-breaker가 있다. 날 호구로 보고 이용해도 되지만 내 외모를 가지고 놀리면 안 돼. 혹은 가끔 술 마시고 날 때리는 건 괜찮지만 바람피우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뭐 그런.     

대선 후보에게도 당연히 deal-breaker는 있고,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 이회창 씨의 경우는 군대였다.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 한국 유권자들에게는 딜브레이커였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당선이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는 최순실이 딜브레이커였다. 아무리 새누리를 지지하고 싶지만, 후보가 저렇다면 지지할 수 없다...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기준선이다. 반기문 씨가 후보로 나온다고 하자. 그렇지만 그 사람이 공중파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쳤다면? 친일 발언한 테이프가 공개되었다면? 새누리 지지자들의 기준선은 어디인가? 아마도 종북/친일/군대 관련이지 싶은데.    

 

어쨌든. 아래의 글은 그 선이 남자/여자에 대해서 아주 다르다는 말이었다. 자, 대선후보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망했을까? 토막살인범은 당선되지 않았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때 포로를 죽이고 인육을 먹었다, 이런 것도 아마 킬러겠지. 그렇다면 OS 심슨처럼, 무혐의 처리되긴 했으나 아내를 죽인 게 확실해 보인다는 사람은 어떤가? 후보로 안 뽑혔을 거다. 교통사고로 어린 아이를 쳐 죽였다면? 실수였다 해도 후보로 나서기는 힘들 걸.     


이번 선거에서 클린턴이 여자라서 졌다는 말이 아니다. 트럼프가 남자였기 때문에 그 딜브레이커 수준이 엄청나게 상향조정되었다는 말이다. 클린턴이 단 한 번이라도 공중파에서 상대방 남자의 성기 사이즈를 가지고 모독을 했다면 후보로 나왔을까? 못 나왔죠. 미국 유권자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트럼프는 무슨 괴물이 아니다. 그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괜찮은!) 남자이고, 그 남자는 여혐러다. 만약 트럼프가 소아성애 포르노를 즐긴다면 곧바로 성토당하고 괴물 취급당했겠지만, 보통 여성들의 성희롱, 성 상품화는 '정상 범주'에 들었다고 본 거다. 우리로 말하면 김구라 장동민 정도. 물론 발언 수위가 높긴 했고 싫어하는 사람 있겠지만 그 정도면 '정상 범위'이고, 똑똑하고 잘난 남자라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단점, 그러니까 딜브레이커가 아니라는 말이지.     

어떤 남자를 사귄다고 하자. 많은 여자들에게 폭력은 딜브레이커다. 한 번이라도 폭력을 행사했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나 폭력 가정에서 자란 여자들 중에는 "술을 마셔서 홧김에 실수한 거야"라고 생각하며,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술 마시고 여자를 때리는 행위는 "좋지는 않지만 정상 범위"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경찰을 부르지 않는다. 만약 남자가 자기 눈앞에서 묻지마 살인을 잔인하게 범했다면 그 어떤 고민 없이 바로 경찰을 불렀을 테지만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배를 발로 찬 것은 자기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정상적인' 문제라고 본 거다.     


트럼프 당선의 의미가 그렇다. 수많은 백인 남자들과 여자들은 그의 발언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정상 범주"에 들어간다고 믿었으니 찍었을 거다. 미친 놈으로 봤다면 그 사람이 핵폭탄을 다룰 수 있는 자리에 보내지 않았겠지. 트럼프 당선에 절망하는 여자들은, 그의 행동과 발언이 딜브레이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정상 범주로 간주하는 사회라면, 그리고 그 사회의 리더가 된다면, 진짜 정신 똑디 차리고 확 뒤집어 엎어야하는구나를 깨달아서다. 

    

앞으로 하나 예고한다. 여성들의 딜브레이커 기준은 점점 바뀌고 있고 그를 따라잡지 못하면 낙오한다. 쥐꼬리 월급 받아오는 남편의 주사와 폭력, 외도, 무관심을 참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아이들을 돌봐야 했던 지난 세월에서 이제는 여혐 발언 하나로도 딜브레이커가 된다. 우리 어머니한테 잘 해야 해, 이 한 마디로 헤어지잔 여자들도 있고 결혼하기 전에 추석 부모님 뵈러 가자는 남친 때문에 아 이건 아니다 싶어 버리는 여자들도 많다. 이제까지는 괜찮았던, '정상 범주'안에 들었던 여혐 발언과 행동들이 점점 딜브레이커로 바뀌어간다. 문학계 예술계 내에서 횡행하던 성추행들이 발각되어 비난당하고, 이제는 더 이상 어린 여성 작가에게 추근대기 힘들어질 것이다. 이것 역시, 아무리 능력 있고 유명하다 해도 성추행은 딜브레이커가 된 것이다.     


니네가 예민해, 오버야, 내가 정상이야 하면서 트럼프를 당선시키고 장동민을 싸고도는 동안 세상은 변한다. 나름대로 여혐 청정 구역에서 살던 중산층 사람들에게 이번 선거는 찬물 한 바께스였다. 아직도 이런 행동이 받아들여진다는 것, 그것을 용인하겠다는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 내 주위가 깨끗하다고 그냥 넘어갈 게 아니었다. 더 싸워야 한다. 더 바뀌어야 한다.     


그 어느 선거에서도 이 정도의 여성 연대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해지진 않을 거다. 여혐러들 눈 뜨고 잘 봐라.     


사족: 

한 단어로 생각했는데 Oxford 사전은 하이픈을 넣네요. 저는 codebreaker 가 한 단어니까 이것도 한 단어! 라고 생각했음. 영어나 한국어나 왜 띄어쓰기를 이렇게 빻았음?

매거진의 이전글 내 남편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