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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Dec 31. 2017

종족번식의 비밀

2016년 12월 3일

애 낳고 인생 배우는 거 있다. 하지만 인도 여행가도 인생 배우게 된다더라(안 가봤지만). 배낭여행 일 년 해도 인생 보는 방법이 달라진다더라(안 했지만). 산에 들어가서 십 년 도 닦아도 달라지고 (안 할 거지만), 우주선 타고 나가서 지구를 바라보면 그렇게 사람이 변한다더라(못 할 거지만). 그 외에 장사해봐야 배우는 인생도 있고 박사 해봐야 배우는 것도 있고 직장 생활 일찍 해봐야 아는 것도 있고... ad infinitum. 하지만 you can't live all lives. 모든 인생을 살 수는 없다. 난 어릴 때 결혼해서 미혼 여자의 삶으로 인생을 배우진 못했다. 반대로 결혼 안 한 사람은 결혼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은 경험하지 않는 거겠지.     


인도에는 안 가봤고 배낭여행도 안 해봤고 산에서 수련은커녕 템플 스테이도 안 해봤지만 애는 둘 키우면서 인생 배운 거라면 포기하는 거. 앞뒤 안 재고 그냥 사랑하는 거. 나 자신에 실망하면서도 꾸역꾸역 노력하는 거.     

오늘 아이 셋을 서울대에 보낸 엄마 얘기가 나왔다. "난 그저 방치했을 뿐이다"란 내용이었다. 내 아이 둘은 특출한 면이 전혀 없는 아이들이다. 사실 많이 느리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신 아이들은 통계적으로 평균일 확률이 높다. 아이들 전체는 by definition 어떤 기준을 쓰던지 반은 평균 이하고 반은 평균 이상이다. 그렇게 우리 큰아들은 평균, 혹은 자기 반 아이들 중에서 제일 어리다 보니 좀 평균 이하다. 둘째는 정말 많이 느리다. 세 돌 반이 되었는데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만두야 혹시 네가 커서 한국어 배워서 이거 보고 있걸랑 니 엄마한테 잘 해라).     


아이를 계획하고 임신할 때만 해도 두려웠다. 아이를 낳았는데 장애면 어쩌지? 안 똑똑하면 어쩌지? 문제아면 어쩌지?     

아이를 낳고 육 년이 지나고 난 두려움을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혹시라도 반전이 있어서 얘네들이 사실은 늦게 피는 천재일 가능성도 있겠지. 그렇지만 나는 그런 위로보다는, 통계적으로 제일 가능성이 높은, 평균 아이로 자라거나 아니면 안 그래도 요즘 취업 힘든데 평생 내가 먹여 살릴 상황을 책임질 심적인 준비를 더 한다. 

    

그 서울대 아이들 엄마는 아이들이 서울대에 가지 못했다면, 대입 망하고 취업 못 했다면 저렇게 자랑스럽게 방치했다고 말 못 할 거다. 당장 나부터도 늘 고민한다. 내가 임신했을 때 뭘 잘못 먹어서 둘째 피부가 예민한가? 내가 무리하면서 일 안 했더라면 좀 나았을까? 내가 일 안 하고 집에서 애들만 돌봤다면 둘 다 말이 좀 더 빨랐을까? 나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난 왜 매일매일 한 시간씩 책을 읽어준다는 엄마들만큼 못하지? 과외를 더 시켜야 하나, 덜 시켜야 하나? 난 애들을 방치하고 있나? 너무 쪼고 있나?     


이럴 때 좋은 의도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조언을 쏟아놓는다. 아니면 내가 인터넷에서 조언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 글을 찾아 읽는다. 그러니 이 글에까지 이래저래 조언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네 감사감사.     

여자로서 아이를 낳는 게 숙명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난 낳았고, 내 삶은 많이 달라졌다. 매일같이 예쁜 아이들을 보면 정말 눈앞이 하얗게 행복하고, 게으르고 이기적이었던 나는 (지금도 게으르고 이기적이지만) 그때보다는 훨씬 더 부지런해졌고 내 이기심의 서클 안에 아이 둘을 끼워 넣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등정이나 봉사활동이 어쩌면 더 자기발전에 도움이 됐을까? 6년 동안 밤잠 제대로 잔 날이 그리 많지 않은 건, 나를 좀 더 좋은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뭐 그건 모르겠고.     


배우긴 배웠다. 주는 사랑이 더 행복한 건 맞더라. 뭘 바라지 않고,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도 사랑할 수는 있더라. 그로 인해 늘 판단 당하고 내 자신을 미워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절대 행복이 있으니 다 참게 되더라. 출산과 동시에 해킹된 뇌 회로의 비정상적인 행복 제조 매커니즘으로, 손해 보고 피곤하고 힘들고 무서워도 현실 부정하고 사랑하게 되더라. 적어도 내 눈에는 내 아이들이 정말 정신이 혼미하게 이쁘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이쁠 수 있나 신기할 뿐이다. 


이게 아마도 종족번식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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