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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Jun 06. 2018

살아온 인생은 어떤 식으로든 자국을 남긴다

2016년 12월 25일

한국말은 블로그, 페북하면서 쓰는 게 99%고 실제로 한국말 할 일은 별로 없는 삶이다. 남아공에서도 가족들과 하는 한국말 외에는 쓸 일이 없었다. 그때는 인터넷도 너무 열악하고 그래서 한국에서 소포 보낼 거면 신문에 좀 싸서 보내달라고 할 정도였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신문이나 월간 조선 같은 거 가지고 오는 것도 매너였고. 그렇지만 한국어가 모국어이니 흔적은 남는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나에게 어느 날 물었다. "추아가 무슨 뜻이야?" 내가 잠꼬대하는 줄은 몰랐는데, 잠꼬대할 때마다 내가 추아.... 추아... 그러더란다 ㅋㅋㅋㅋ. 그리고 다른 건 모르겠는데 뜨거운 것에 데면 "앗 뜨거!" 한다. 영어로 욕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약 90%는 한국말로 앗 뜨거가 나온다.

     

남아공 떠난 지 이제 8년 꽉 채우고 9년 차다. 의식적으로 고치려고 하는데도 귀여운 것만 보면 ag, shame! 이 바로 나온다. 누가 다쳤다고 해도 ag, shame! 이거 진짜 안 고쳐진다. 누가 무슨 말 하면 "아, 그래?" 라는 식으로 넣는 is it??도 그렇다 (남아공 특유의 억양이 있다 ㅋㅋ). 그리고 발음 신경 안 쓰면 i 가 "으" 발음으로 자빠진다. Bin이 빈이 아니라 븐. Here는 또 '히아'로 샌다. 20년 삶 지우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traffic light를 robot이라고 하는 건 웃기게 들리니 좀 나아지긴 한 건가.     


내가 기억하는 첫 몇 크리스마스는 연극과 노래하느라 분주했던 교회에서였다. 그러고 나서 스무 번의 크리스마스는 늘 여름이었다. 해가 가장 긴 날인, 보통 구름 하나 없고 27도 정도의 날씨에 수영장 옆에서 고기 구워 먹고 수박화채 해 먹고 뭐 그런. 쇼핑몰 같은 데서 북반구 흉내 낸답시고 눈썰매 장식, 산타 장식 갖다 놓고 해도 전혀 안 와 닿았다.     


이제는 진짜 겨울의 크리스마스인데 별 감흥은 없다. 엄청나게 저렴해진 제조원가로 어딜 가나 크리스마스 장식이 뻑적지근하게 되어 있다. 크리스마스 스페셜 음식도 곳곳마다 쏟아져 나온다. 터키 로스트, 일 년에 한 번은 먹어야 하는 브뤼셀 스프라우트(싹양배추?? 한 번도 못 들어본 이름), 민스파이, 크리스마스 케이크 등등. 우리는 야채 타르트 굽고 징그러운 브뤼셀 스프라우트를 치즈에 질식시켜서 오븐에 굽고, whitebait(새끼 물고기라고 하네??) 튀겨서 근본 없기 짝이 없는 듣보잡 크리스마스 디너 해 먹었다. 그리고 나 홀로 집에를 애들이랑 봤다. 정말 어렸을 때 본 거 같은데 이제 내 아들도 영화 속 매컬리 컬킨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시간은 가고, 나는 늙고, 그러면서 이래저래 세월의 자국은 남고.     


미친 2016년도 이젠 얼마 안 남았네요. 좋은 성탄절 보내셨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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