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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Jun 06. 2018

남자가 강간피해자라면

2016년 12월 30일

강간 피해자를 여자로 가정하고 말할 때마다 "남자 피해자도 많거든요!!" 하는 분들 계시니 그럼 이번에는 남자 피해자로 가정하고 얘기해보자.     


직장 새내기인 남자 직원이 선배에게 강간을 당했다. 평소에 잘 챙겨주는 선배고 조언도 해주는 선배라서 둘만 술 마시러 가자고 했을 때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 선배가 남자도 좋아한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그냥 넘겼다. 술을 너무 먹어 필름이 끊겼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모텔이었다.     

이 남자가 강간을 당한 것은 조심하지 않고 선배를 따라간 잘못인가? 남자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 시간에 술 마시러 간 잘못인가? 그 날 그 피해자 남자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궁금한가? 만약 운동을 하고 몸이 좋아서 조금 들러붙는 셔츠를 즐겨 입는 남자였다면, 그 남자는 당해도 싼가? 모텔까지 따라간 것이 잘못인가? 남자는 원래 성욕이 세고, 그런 남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니까 술 많이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인가?


이런 논리는 대다수의 여자 피해자가 듣는 이야기다.     


이 남자 피해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선배에게 당한 그는 경찰에 곧바로 가야 하지만 망설인다. 나중에 다른 이들은 그에게 물을 것이다. 왜 경찰에 바로 안 갔어? 화간 아니야? 아니 당했으면, 니가 숨길 게 없으면 안 갈 이유가 없잖아?     

남자 피해자는 상상한다. 강간당했다는 말이 퍼지면 사람들이 나를 뭘로 볼까. 더 이상 남자로 보이지 않는 게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내가 강간당했다는 말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선배와의 관계는 확실히 틀어질 거고, 사장님은 선배를 되게 아끼는데 나보고 나가라고 하지 선배를 자르진 않겠지. 선배가 나 아니라고 하면 어쩌지. 증거 남기려면 지금 당장 가야겠지.     


여자 피해자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단지 그녀는 지금까지 들어왔던 '피해자 두들겨 패기' 서사에 더 익숙하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끼가 보였다느니, 평소 행실이 어쩌고, 담배 피우는 게 어쩌고, 문신이 어쩌고, 피어싱이 어쩌고, 그게 아니면 립스틱 색깔까지 꼬투리 잡아서 '걔 좀 그런 애 같지 않냐'라고 쓰일 것을 안다.     

남자 피해자는 병원에 간다. 보통은 여자 피해자이기 때문에 남자로서 훨씬 더 민망하고 말하기 힘들 수 있다. 여자 간호사에게 강간당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힘들고, 남자에게 말하는 것도 절대로 쉽지 않다. 아니 그냥 말 하고 싶지 않다. 시간을 그 전날로 돌리고 싶다. 왜 그 선배를 따라 나갔는지 자신을 쳐 패고 싶다. 검진을 받고 경찰 진술을 하는데 질문 하나하나가 칼처럼 박힌다. 어디에서 술 드셨어요? 뭐 드셨어요? 왜 뻗을 때까지 마시셨어요? 모텔 간 건 기억 안 나죠?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나요?


여자 피해자를 배려한 성폭행 전문 센터가 생기고 훈련받은 경찰관이 배치되고 하는 거 아주 최근 일이다. 그 전까지는 경찰서에 가서 성범죄 관련 감수성 제로인 경찰관에게 취조받고 왜 행실 제대로 안 해서 날 귀찮게 하느냐는 식의 태도를 접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마 지금도 그런 곳들이 더 많으리라 본다.     


남자 피해자는 직장에서 아주 불편해진다. 위로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믿어주지 않는 이들, 새로 이상한 애가 들어와서 회사 분위기 전체 이상하게 만든다는 사람도 있다. 이제는 자신이 노이로제에 걸릴 참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다. 자신을 볼 때마다 '당한 남자'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보여서다.     


여자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면 그 '강간 장면'을 떠올리면서 야릇하게 즐기는 듯한 이들도 보인다는 것. '어차피 버린 몸'이라 생각하는지 성희롱 강도가 더 높아진다는 것. 같은 여성들도 '쟤 그럴 줄 알았어' '지가 쉽게 좀 흘렸겠지'라는 식의 판단을 한다는 것.


남자도 성폭력 당한다고, 여자 꽃뱀이 많다고 하니까 묻는다. 당신은 합의금 그 몇백 받으려고 온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강간 피해자라 떠들고 다니고 싶나? 아니잖소. 그런데 왜 여자는 그럴 거라 생각하지? 강간당했다고 하면 시집가기 쉬워서? 다른 여자들이 좋아해 줘서? 주위 사람들이 다정하게만 대해줘서? 진급이 쉬워서? 사회가 '몸 버린 여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잘 알면서, 인간 쓰레기급 껄떡이들이 이혼녀나 노처녀에게, 그리고 자기네들이 보기에 '약자'에게 훨씬 더 들이대는 거 알면서, 강간 피해자라고 소문나서 인생에 1도 도움이 안 될 거 알면서, 여자가 정말 합의금 받으러, 혹은 남자에게 앙심을 품고 경찰 앞에 앉아서 어떻게 당했는지 설명할 거라 생각하나? 

    

여성 상대 성범죄 얘기 나올 때마다 남자 성폭력 피해자도 많으니 잠재적인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 일반화하지 말라 등의 지적 나오는데, 그렇다면 제발 남자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해보길 바란다. 지금의 강간 문화, 피해자에게 책임 전가 문화가 과연 정상인가? 강간 사건 기사마다 '꽃뱀' 얘기 나오는 것이 정상인가? 나는 강간을 당했는데 가해자의 창창한 미래를 고려해서, 그 날 내 옷차림을 고려해서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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