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잡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Jun 06. 2018

엔지니어의 피와 크리스마스 다음날의 칠면조

2017년 1월 2일

엔지니어의 피가 분명히 있다. 그들 중 몇은 DNA에 깊게 박혀있는 단어 몇 개에 평생 휘둘려 사는데 그중 하나가 "효율성". 

이것 때문에 선물도 사기 싫고 비싼 맛집도 가기 힘들다.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능과 품질에 합당한 가격이 있는데 그게 합당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브랜드' 같은 이유로 돈을 내려면 뇌혈관이 터지거나 최소한 장출혈이다. 돈의 액수는 상관없다. 오히려 큰돈도 그냥 훌러덩 쓸 수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성비"라는 가이드라인을 얼마나 오만방자하게 무시하는가에 대한 정당한 분노다.     


나도 남편도 이게 좀 심하다. 그리고 우린 둘 다 날짜에 무심하다. 생일 기념일 이런 거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 전에 더 비싸게 나오는 칠면조를 사는 것보다, 그 다음날 떨이 나오는 것을 사는 것이 합당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싸다고 꼭 사지는 않는다. 가성비 가이드라인을 너무나도 처참하게 박살 낸 칠면조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5.5킬로인데 3파운드임. 지금 환율로 4500원. 12~14인분. 이런 미친 가성비를 봤나. 너무 신기하다! 라는 생각에 남편은 무려 칠면조 세 마리를 담았다(...). 오븐에 넣었다. 네 시간 로스트해야 한다. 전기세가 더 나왔겠다. 어쨌든, 살을 발라냈다. 무시무시하다. 칠면조 파히타를 만들었다. 칠면조 파이를 만들었다. 칠면조 스튜를 만들었다. 닭죽 비슷하게 칠면조 죽도 만들었다. 아직도 남았다. 칠면조 카레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냉동고에는 칠면조가 두 마리 더 남았을 뿐이고 (...) 냉동고에 칠면조가 두 마리 들어가 있으니 자리도 얼마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냥 닭으로 보고 레시피를 마구 생각해내고 있다. 안동 칠면조찜. 불칠면조. 칠면조 국수. 칠면조 샌드위치. 칠면조 크림스튜. 칠면조 토마토 스튜. 칠면조 샐러드. 칠면조 볶음탕. 칠맥 (...).     

내가 또 칠면조 사면 사람이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공계생들의 편견 계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