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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Jun 08. 2018

이번 생은 망한 느낌

2017년 1월 18일

우리 집 큰아들 판다 군은 태블릿으로 게임을 즐겨한다. 요즘 아이들이 너무 스크린 들여다보고 책은 안 읽고 한다 싶어서 좀 많이 잔소리하는 편이었다. 무슨 좀비 게임을 깔았는데 이놈이 맨날 그거 들여다보고 있고, 이젠 돈까지 필요하단다. 좀비달러를 사야 이걸 할 수 있고 저걸 할 수 있고 등등. 그래서 소설책 한 권 다 읽으면 10파운드짜리 구글 플레이 상품권을 끊어주겠다고 했다. 애들용이지만 200페이지짜리 소설이라 설마 다 읽을까 싶어서였는데... 읽었다. 독한 놈 같으니라고. 그래서 10파운드 상품권 줬다. 또 뭘 해야 상품권 주냐고 해서 용돈인 셈 치면 그리 나쁘지 않겠다 싶어 장난감 치운 것, 동생하고 놀아준 것, 요리 도와준 것, 꽤 어려운 책 읽는 것 등등 하여 두 주 만에 10파운드를 또 줬다. 

남편과 나는 이 ㅅㄲ 우리 어렸을 때의 몇 년 용돈을 한꺼번에 받는다며 혀를 끌끌 찼다. 남편이나 나나 좀 망한 집안에서 커서, 우리 집 애들 보면 니네 참 출세했다 싶다. 두 돌도 되기 전에 뱅기 타다니. 니네 아빠는 스물 넘어서야 뱅기 탔다.     


어쨌든. 하도 좀비좀비 하길래 판다 군이랑 같이 앉아서 무슨 게임인지 봤다.     


그리고 또 봤다.     


그리고 같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더 하기 시작했다.     


"판다야, 엄마가 어제 자기 전에 네크로펌킨 심어뒀어!! 기어도 더 모았으니까 케이블 만들 수 있어!! 라이브러리 증축 끝났어!!", 라고 아침에 일어난 판다에게 양파가 어느 날 말했다. 

"엄마 땡큐!! 그럼 티본베리 만들어야지!!", 라고 아침에 일어난 판다 군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리고 등교 전에 엄마와 아들은 나란히 앉아서 열심히 좀비 퀘스트를 했다.     


그리고 양파는 곧 깨달았다. 좀비달러가 진짜 중요하구나. 그거 있으면 무지 편해지는구나. 내가 그걸 모르고 판다 군을 구박했어.     

"판다군아, 책을 좀 읽지 않으련?" 이라고 양파가 꼬셨다. 

"왜?"

"책 읽으면 엄마가 상품권 줄게!!" 라고 양파가 눈을 희번득이며 말했다. 사실은 그냥 구실이 필요했다. 왜냐면 양파는 좀비달러가 아주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편한테 이실직고하기엔 창피하고, 판다 군이 책을 읽었으니 줘야 했다고 둘러대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판다 군은 협조했다.     

...그런데 좀비달러는 빨랑 사야 했고 상품권은 가게에 가서야 살 수 있고 시간은 밤이었다.     


양파는 신용 카드를 꺼내어 결제했다;;; 사실 좀비달러 좀 많이 샀는데 판다 군한테는 내가 좀 쓰고 난 다음에 남은 걸로 선물이라고 생색냈다. 판다 군이랑 같이 플레이하면 잔소리가 많아서 내가 쓰고 싶은 데에 몰래 썼다. 그래 나 이런 엄마다.     


많이 창피했던 양파, 남편 어깨너머를 보고 안심했다. 남편님은 판다 군이 요즘 많이 하는 게임 slither.io를 자기 폰에 깔아서 열심히 하고 있었다 (...)     


아무래도 이번 생은 망한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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