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2일
어제 있었던 그 부산대 교수 사건에서 나는 분명히 '내니'라고 생각하는 데에 반감을 못 느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반감을 느꼈다. 나는 해당 인종 (아시아계)이고, 실제 백인 남자-아시아계 여성 커플이고, 저런 상황을 자주 경험했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럴 때 왜 그런가를 디버깅해보자면 -
나는 인성이 훌륭하므로 그런 데에 예민하지 않아서 ㅡvㅡ? -> 응 아니야.
나는 인종차별에 예민하지 않아서? -> 설마.
이럴 때는 욕 먹더라도 계속 물어본다. 어디에선가 에러가 났단 말이지. 왜 나는 완전 딱 들어맞는 케이스인데도 안 예민한 반응을 보였을까.
오늘 아침에 댓글놀이 하다가 드디어 깨달음이 왔다. 이건 런던에서 애 키우다 보니 '내니'라는 단어 자체에 연상되는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서다...가 지금 이론. 만약 댓글에서 '베이비시터' 혹은 '메이드'라고 했으면 뙇 와 닿았을 텐데 그게 아니라 내니라서.
육아 7년째고, 돈 못 버는 편은 아니지만 내니 고용한 적이 없다. 내 주위에서도 내니를 오래 고용한 사람 별로 없다. '고용'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진짜로 고용주가 되어서 법적 책임 및 보험 처리 세금 처리 다 해야 해서 골치 아프고 (난 내 세금 처리도 제대로 못 한단 말이다 ㅠ0ㅠ), 이 모든 것이 세후 월급으로 하기 때문이다. 입주인 경우 최소 2~3만 파운드에서 시작하고(3~5천만 원), 입주라 해도 밤새 봐주고 그런 거 없다. 일하는 시간 딱 정해져 있고 휴가나 병가 내면 유급이며 다른 사람 구해야 한다. 고용주라고 깝질하고 그런 건 상상도 못 한다.
내니는 보통 자격증 있는 영국인이고, 오페어나 베이비시터라면 이민자가 많다. 그래서 내 뇌 속에서 "내니"=> 괜찮은 연봉 받는, 자격증 있는 영국인이다. 프랑스어 하는 집에서는 프랑스어 쓰는 내니 쓰려고, 학력 높은 내니를 연봉 두세 배 줘가면서 쓰는 경우도 있고, 중국인 집에서는 중국인 내니, 이태리 가정에서는 이태리 내니 이렇게 쓴다는 얘기도 들었다. 캐서린 제타 존스가 웨일즈 출신인데, 미국에서 웨일즈 출신 내니를 아주 높은 연봉으로 불러와서 쓴다는 얘기도 있었다. 메리 포핀스에서처럼, 내니라고 하면 저임금 돌보미를 연상하진 않는다. 특히 미국에서 영국인 내니들 인기가 높아서 티브이 프로그램도 있다던데 어쨌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 누가 내니로 봤다면 열 받을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보통 가정에서 내니는 언감생심이고, 오페어를 많이 쓴다. 오페어 역시 비하할 거리가 없는 게, 나이 어린 학생들이 1년 정도 영국에서 생활하면서 언어 배우고 홈스테이하고 아이 봐주는 거 좀 돌봐주고 가사 좀 도와주고 그 정도다.
지난 7년 동안 우리 집에도 오페어 일곱 명 넘게 있었던 것 같은데, 루마니아 아가씨 둘, 체코 아가씨 둘, 프랑스 아가씨 하나, 슬로바키아 아가씨 하나, 그리고 지금은 스페인 아가씨다. '금발 벽안' 백인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집들도 비슷하다. 폴란드가 특히나 많았는데 요즘에는 스페인, 이태리 출신들이 많더라. 오페어 역시 '허드렛일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해외 홈스테이하는, 내가 좀 돌봐줘야 하는 학생 느낌이다.
그리고 인종차별 문제.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영국 백인은 지금까지 세 명 정도였다. 그나마 다 남자였다. 같이 일하는 백인 여자는 폴란드인, 러시아인이다. 영국 출신 여자는 없었다. 그냥 별로 부딪힐 일이 없다가 학부모가 되면서... (눈물 주룩). 이게 인종차별인가 느낄만한 경험 자체가 별로 없고, 맨날 점심 사 먹던 프렛이나 그 외 서비스업종에도 (런던에선) 영국인 직원이 드물 정도. 이건 아마 런던 특성일 것 같다. 뉴욕이 코스모폴리탄 하다던데, 난 가서 '뭐야 그래도 미국 사람이 대부분이잖아' 하고 놀랐다. 난 뭐 매일 보는 사람들 중에 영국인이 10% 이하인 거 같은데..;; 그리고 약간 반대 패턴도 있을게, 미팅 들어갈 때 여자가 있다면, 중국인/인도계 여자면 테크 쪽일 거라고도 생각하는데, 백인 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보니 PM이려니 할 때 있다 (...)
영국에는 EU 이민자들이 많고 그 외 이민자들은 훨씬 적다 보니까 '망할 이민자들!' 할 때 한중일이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영국에서 '아시아계'라고 하면 어차피 인도계를 칭해서 ;ㅁ; 그나마 인도계/파키스탄계라면 EU 밖에서 들어오긴 쉽지 않았을 테니 이민자라면 기술자 이민 비자 출신이 많을 터고, 아니라면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영국인들이 자주 접하고 빨랑 나가라 하는 사람들은 비백인들도 많다. 오히려 흑인 대상 인종차별이 덜 눈에 띌 정도. 루마니아 거지들 나가라, 리투아니아 얘네들 왜 와 있냐, 폴란드 꺼져라, 스페인 이태리 애들 왜 여기까지 와서 복닥거리냐, 프랑스 악센트 듣기 싫다 ... 다 들어본 말이다. 오히려 중국인 비하는 별로. 이슬람 혐오는 상당하다. 그렇지만 바로 그 이유로 내니나 베이비시터로 무슬림 여성을 보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부모들이 꺼려한다. 그러니 무슬림 여성 - 백인 여성이 둘이 걷는데 아이는 피부가 연하고 머리색깔이 까맣다면, 난 오히려 백인 여성이 오페어/내니가 아닐까 생각할 듯.
결론1.
'내니'라는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반응이 갈라졌다. 인종별로 소득, 사회적 위치까지 갈리는 곳, 그리고 그 패턴이 확실한 곳에 사는 사람에게는 곧바로 비하로 다가올 수 있고, 내니라는 직업과 인종이 그리 연관되어 있지 않거나, 아니면 영국처럼 그 나라의 주류 백인이 주로 내니인 곳, 인종과 직장에 대한 연관성이 그리 크지 않은 곳이라면 그게 왜 비하인지 못 느낄 수 있겠다는 것. 딱히 내가 안 예민한 둥글둥글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흑).
결론2.
나는 안 예민한데 왜 다른 사람을 예민할까 싶으면 물어봐서 배우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내가 인성이 좋아서 ㅡvㅡ' 이런 케이스는 없었네요.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