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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Jun 12. 2018

말이 늦은 아이들과 아인슈타인 신드롬

2017년 5월 21일

세 돌 반인 둘째가 말이 많이 늦다. 기저귀도 아직 못 뗐다. 고집이 엄청 세서 유치원과 몇 번이나 상담을 하고 전문가도 주루룩 보던 중이었다. 자폐증상이 보이기도 하지만 전혀 반대로 안기기 좋아하고 루틴을 고집하고 그런 건 없다. 새로운 환경도 아주 좋아한다. 겁도 없다. 지금까지는 좀 모자라도 내 새끼고, 그냥 무진장 이뻐해주는 것 외에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번 주에 발견한 거. 얘 글을 줄줄 읽는다. 이런 현상에 이름이 있더라. Hyperlexia. 한국어로는 과독증이라고 하던데, 둘째는 사실 이전에도 알파벳은 알았다. 간단한 단어도 읽었다. 하지만 난 그냥 이런 그림은 이런 소리가 나는 거라 외워서 반응한다 생각했었다. 뜻을 모르는 게 분명해서 더 그랬다. 그런데 보니 처음 보는 책을 갖다 줘도 줄줄 읽는다. 어려운 단어도 대강대강 읽는다(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교차검증 및 다수의 실험 후에야 믿는 이런 엄마.. 쿨럭;;).    

 

과독증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1) 똑똑한 애들이 그냥 일찍 읽기 시작하는 것 

2) 아스퍼거나 자폐 + 과독증 

3) 어렸을 때 자폐 증상이 보이고 글도 빨리 읽지만 크면서 자폐 성향은 사라지는 케이스. 


여기에서 3) 번은 아인슈타인 신드롬과 연결된다. 보통 2)와 3) 그룹은 줄줄 읽긴 해도 자기가 뭘 읽는지는 모른다.     

보통 아이들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말은 자연스럽게 배우지만 글은 가르쳐야 안다. 과독증 아이들은 반대로 글은 어떻게 읽는지 쉽게 배우지만 말의 이해는 늦다. 어찌 보면 그게 더 자연스럽다. 어른에게 한글 읽기 가르치는 것은 며칠이면 가능하지만 한국어 자체를 배우는 것은 훨씬 더 힘드니까.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이 어른이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보통 과독증은 자폐증에 연결되다 보니 그리 좋게는 보지 않는 것 같다.     


사실은 나도 말이 늦었고 글은 엄청 일찍 읽었다. 둘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했다고 하고, 엄마에 따르면 어렸을 때 자폐 증상도 꽤 보였다고. 하지만 자라면서 없어졌다고 했고(난 자폐증은 타고 난 거라 '크면서 없어진다'라는 건 없다라고 알고 있어서 지금까지는 엄마 말 안 믿었다 미안 엄마), 난 지금도 말로 듣는 데에 약하다. 강의 듣는 것보다 그냥 책으로 공부하는 게 훨씬 빠르다. 외국어를 배우면 말하고 듣는 것보다 글 쓰고 읽는 수준이 훨씬 높고, 빨리 는다. '자연스럽게' 뭔가를 배우지 못하고 죽어라 분석해서 배운다. 언어 배울 때 문법 무척 좋아한다.     

그러니 나도 거의 확실히 과독증 hyperlexia. 남편 역시 어렸을 때 안 가르쳐도 글을 혼자 아주 일찍 배웠다고 하니 같은 증상. 


자, 그렇다면 아인슈타인 신드롬은?     

말이 늦은 아이들을 상대로 한 연구인데, 둘째와 싱크율이 100%다. (아스퍼거+과독증의 경우는 말이 늦지 않다). 말이 아주 늦는 아이들 - 세 돌까지 말 한마디도 안 한 아이들도 있고, 다섯 돌이 되서야 쌍방 대화가 가능한 아이들도 많다. 기저귀 떼기가 대체적으로 늦다. 그리고 직계 가족들 (부모, 조부모, 삼촌/이모/고모 등) 중에서 엔지니어/IT/과학/회계/의사/음악 쪽이 많다. 나와 남편은 둘 다 IT고, 나는 피아노를 오래 쳤다. 남편은 음악을 배울 기회가 없었지만 배운 사촌 중에는 전공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 아버지가 조종사셨는데 그것도 리스트에 있더라. 어머니는 공대에 잠깐 다니셨다. 

이 책에서 나온 아이들 보면 부모가 수학 교수, 과학 선생, 회계사, 피아니스트, 할아버지가 엔지니어 등등, 보통 3~4명의 직계 가족이 그 직군이다. 고집이 센 아이가 많고,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에만 강한 호기심을 보이고 시키는 건 잘 안 한다(...나야 나 ㅠ.ㅠ). 시키는 걸 안 하다 보니까 말이 늦어서 테스트해보면 발달 장애나 저능 판단, 자폐 증상을 받기도 쉽다.     


사실 둘째 낳기 전에도 이공계에서 20년 가까이 있다 보니 그들만의 특성이 확실히 보였다. 이건 대학에서보다 이공계 업계 10년 정도 지나면 확 보인다. 그리고 남아공에 있을 때보다 영국에서, 좀 더 들어가기 힘든 곳에서 더 보인다. 

음악을 한 사람들, 귀가 아주 예민한 사람들, 그 외 빛이나 소리에 예민한 사람들이 많고, 대인관계를 어려워하진 않더라도 내성적인 사람들이 많고, 말은 잘 못 하더라도 글로 된 정보 처리속도는 빠르고, 스포츠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많고, 그 외 취미가 많이 겹친다. 뭔가를 만드는 것, 어느 한 분야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관심 등등. 다 이렇다는 건 아니고 이 중에서 몇 개에만 해당하는 사람도 많지만, 확실히 이공계에서 오래 기술직으로 남은 사람들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교해서 특성이 있다. 말이 늦었다는 이들도 많다. 아인슈타인 신드롬으로 분류된 아이들이 싹 다 머리가 좋은 건 아니고, 모두가 다 수학 음악에 재능을 보이지는 않으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택한 진로가 이공계 쪽이다. 책 저자의 아들 역시 커서는 개발자.

     

둘째 때문에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오히려 나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해야 하나. 난 거의 모든 걸 읽어서, 생각해서, 분석해서 이해한다. 설명 잘 한다는 얘기 가끔 듣는 게 아마 그래서일 거라 생각한다. 내 자신이 누군가 설명한 걸 보고 읽고 분석해서 이해한 거라 설명이 쉬운 거지. 그냥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아는 거라면 그게 힘들 텐데 내가 나 자신을 한 번 납득시켰기 때문에. 

아 참. 그리고 해변은 햇빛이 밝아서 싫고 클럽이나 공연장은 시끄러워서 싫다. 음악이 시끄러운 레스토랑 싫어한다. 감각에 예민해서 불편한 옷 싫고 향수 싫고 그렇다. 이 그룹 아이들 중에 어린이 근시/ 알레르기/ 왼손잡이 중 하나 이상 해당하는 아이들이 80%라는데 나는 근시+ 양손잡이 + 알레르기. 남편도 똑같다. 둘째 역시.     

난 사회성이 많이 떨어졌다가, 이사 다니면서 갑자기 외향적이 되었다는데, 아마도 둘째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나도 그랬겠지. 그러니까 지금도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주변의 시선이 어떤지 잘 모르고 산다. 둘째가 어른들에게 이쁨 받으려는 노력을 거의 안 하듯이 나 역시 비슷했으면 지금의 '아님 말고' 태도가 설명이 된다. 좋아해 주면 좋고. 아님 말고.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 봐 하면 곧잘 따라 하는 아이들과 달리 둘째는 그냥 지가 내키는 것만 한다. 나 역시 그렇고.     

어쨌든. 책은 The Einstein Syndrome입니다. 첫 책은 Late Talking Children 이었다고 하는데 스티븐 핑커 옹이 추천사를 써주셨군요. 책은 읽을 만합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말은 늦고 글은 일찍 읽은 분들 - 한국어 자료는 찾기 힘들고 많이 부정확하더라고요. 비추합니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다시 - 


- 아인슈타인 신드롬이라고 해서 다 엄청 똑똑하다 이런 건 아니고요 

- 말이 늦다고 해서 무조건 아인슈타인 신드롬은 아니고 

- 어떻게 보면 커서도 계속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저처럼. (아직도 빛과 소리에 예민하고 일부러 신경 안 쓰면 주위 사람에게 무심하고 말 잘 못 알아듣고 분석해야 이해하고 소설 피하고 등등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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