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으로 살아가기
어제 만두양이 아팠다. 열이 심하게 나는데 그럴 때 유치원에 보내봐야 빠꾸먹는다. 그러니까 집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난 2주에 한 번씩 있는 중요한 팀 미팅이 아침에 있다. 빠지기 힘들다. 데모도 해야 한다. 재택근무 아예 못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좀 직접 가야 하는 그런 미팅이다.
우리 집에는 지금 오페어 아가씨가 있다. 하지만 그 아가씨도 아침에 어학원에 가야 한다. 열두시 반 부터는 봐줄 수 있다. 뭐 내가 좀 밀어부치려면 아가씨더러 학교 가지 말고 오늘 아이만 보라고 할 수는 있겠다.
남편도 있다. 내 직장보다는 재택이 만만하지 않고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눈치 좀 보인다.
결국은 남편이 한 시까지 만두양을 보고, 오후에는 오페어 아가씨가 봤다. 그런데 이런게 일 년에 한 두번이냐 하면 아니죠. 자주 일어나죠. 게다가 애는 둘이네요. 아픈 것만 아니라 다른 잡다한 일도 많죠.
나름대로 한국에서 노력하는 여성상이라고 부를 만큼 열심히 살았다. 20대 초반 고졸 월급 50만원 유부녀에서 출발해서 멀리 왔다. 나 정말 열심히 사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게 -
- 여유로운 직장생활 덕분에 직장다니면서 공부가 가능했다. 직장 다니면서 학사 석사 다 끝냈다.
- 유부녀라고, 고졸이라고 차별당하지 않고 취업이 가능했고 이직도 가능했다.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아이 낳을 거냐, 애 보느라 직장 일 제대로 못하지 않겠냐는 식의 말 한 적 없다.
- 아이 낳았을 때 유급 출산 휴가 6개월 받았다. 그 때 석사 공부 왕창 끝냈다.
-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거의 2년 동안 아이를 봐주셨다.
-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좋은 어린이집이 몇개씩 있었다 (미친듯이 비쌌지만 orz;;;)
- 아이들 등하교를 봐줄 수 있는 오페어 아가씨들을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 남편이 절대적으로 가사를 나눠한다. 육아, 요리 등등 내가 독박쓰는 부분 전혀 없다.
- 내가 따로 남편 챙겨야 할 일이 없다. 아, 빨래는 내가 담당하는군.
- 아이가 아프면 재택근무 가능하고, 많이 이해해주는 편이다.
- 아이가 아프면 남편 역시 재택 근무를 얼마 정도는 할 수 있다.
-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료비는 무료다. 다행히 아이들이 건강하게 태어났다.
이 중에 하나라도 빠졌으면 난 솔직히 제대로 못 했을 거다. 이게 다 사회적 보장, 운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말했지만 나 상당히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빡세게 살고 있다. 정부에서 돈을 퍼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 부부는 세금 매달 무지막지하게 토해낸다. 보육비 지원 당연히 하나도 못 받고 육아비용만 매달 3-400 들어간다.
그렇지만.
9-10시 출근 5-6시 퇴근. 주말 근무 없음. 남편도 마찬가지. 아이들 등하교 책임져주는 사람 따로 있음. 아주 급하면 친정 어머니 국제 호출 가능함. 아이들 아프면 봐줄 오페어 아가씨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시간 내는 것도 가능하고, 마지막으로 신랑이 시간 낼 수도 있고, 정말 아프면 연차 내도 안 짤릴 자신 있고, 정말정말 급하면 친정혹은 시댁 식구/간병인 붙이는 게 가능하다. 병원비는 무료다. 아이 있다고 직장에서 손해보는 거 없고, 눈치 안 보고, 진급에 상관 없으며, 다른 직장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이가 있고 없고에 상관 없이 가능하다. (영국이라고 지상 천국이라는 건 아니다. 나도 내 직종에서, 고소득자로서 괜찮은 직장이라 분위기 좋다는 거 안다. 저소득층으로 내려갈 수록 직장은 빡세지고 배려 따윈 사라진다. 그래도 한국보단 낫다만.)
정부에서 보육비 보조해주는 것보다, 나한테는 나에게 부담주지 않고 가사 분담하는 남편, 시댁에 시간 안 뺏기기, 호의적인 직장 분위기, 호의적인 노동법, 근처에 맏을 만한 어린이집이 있는 것, 아이 봐줄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황이 백배 천배로 도움 됐다.
내가 한국 있었어도 이게 과연 가능할까. 내가 아무리 똑똑하고 노력형이라 해도, 나 혼자 이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이게 개인 노력으로 커버 가능한가? 내가 남편 아침 밥 차려가면서, 애들 멀리 있는 어린이집으로 등하교 시키면서, 애들 아프면 곧바로 호출 당하면서, 시댁 행사 챙겨가면서, 직장에서 애 엄마라 차별받아 가면서, 백업해줄 친정엄마/쉽게 구할 수 있는 보모 시스템 없이,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근성으로 공부 열심히 하면 그게 해결되나?
만약 내가 건강 문제로, 혹은 아이 건강 문제로 잠시 직장을 관뒀다면, 전업이니까 니는 집에서 애나 봐라...가 되잖아. 다시 자격증이라도 따서 재취업 하고 싶다면? 프리랜서 일이라도 하고 싶다면? 집에 있으면서 애는 안 보고 어따 애를 맡기려고 하냐는 소리 듣는 거겠지.
당장 내가 내일 남편 직장 때문에 한국으로 간다고 하자. 난 한국에서 열혈 직장맘으로 살 수 있을까?
글쎄. 친정어머니가 완전히 같이 살면서 백 퍼센트 보조해준다 하더라도 힘들 것 같은데. 당신은 애 둘 있으면서 빡센 연봉 받고 칼퇴근 하면서 자기 계발 시간도 확보할 수 있는, 남편 역시 비슷하게 버는 워킹맘 몇 명을 아는가? 나는 엄청 많이 안다. 내 주위에 널렸다. 나보다 훨씬 더 잘 나가면서 애들도 나보다 훨씬 더 잘 보는 엄마들 많다.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런던 사는 여자들이 딱히 더 근성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나?
결국, 열혈 직장맘과 전업맘은 한끝 차이다. 난 단 한순간도 내가 돈을 번다고 해서, 직장 다닌다고 해서, 직장과 집안일을 어느정도 겸 한다고 해서 내가 전업주부보다 더 열심히 산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상황을 다 내 노력으로 얻었다고 자만할 수가 없다.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그 모든 사회적 분위기와 배려가 없었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냐에 상관 없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거라는 거 알기 때문이다.
제발 좀. 정말 출산율이 문제라면, 애 가진 엄마로서의 하루 찾아보는 거 아주 쉬운데 한 번 읽어나 봤으면 한다. "저출산율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는 이런 노력을 했습니다" 이딴 공치사용 정책 말고, 진짜 정말 애를 낳더라도 그럭저럭 잘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게 좀 해 주라고.
그리고, 여자보고 취집한다고, 집에서 논다고 욕하는 남자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오늘 아침 출근해야 하는데 애가 39도다.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애가 아프면 어린이집에서는 누구에게 전화를 하는가?
이런 상황을 오롯이 책임져야 했던 가장 최근이 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