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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Dec 31. 2017

소심할 수밖에 없던 당신의 목소리가 커지도록

2016년 9월 23일

이번 해 초중반이었습니다. 구독자가 4천 명인가 되었을 때 정말 겁이 덜컥 났습니다. (저 사실 새가슴에 겁 많은 사람입니다 ㅋㅋ) 아놔 사람 모이면 말 많고 일 많고 귀찮아지고 이상한 인간들 꼬일 가능성도 높은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커졌네. 확 엎어버리고 튈까.     


이 생각 아직도 매일 합니다. 그때 정말 저답지 않게 진지 빨고 다짐했는데도 그래요. 어디까지 가나 보자. 나처럼 뒷일 걱정 안 해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몸 사리면 딴 사람은 어쩌냐. 페친이 남자가 대부분인 한국 공대녀는 어쩌고, 찌질이 개저씨 상사나 선배들이 줄줄이 페북에 포진해 있는 남자들은 어쩌냐. 좋아요 누르기도 무섭고 뉴스 공유에 고나리짓도 엄청 많은데, 그런 거 하나 없는 니가 그러면 안 되지.     


그리고 또 안 엎은 이유가 - 메갈 등장 직전 네이버 댓글란 기억하시나요? 전 기억해요. 무서워서 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메갈 등장하고 나서 정말 그 어떤 남자들보다도 질펀하게 욕해주는 언니들 보고 나니까...     

겁이 없어졌어요. 쌍욕 달린 댓글 봐도 덜 무섭고, 거기에 제 댓글도 달 수 있겠더라고요.     

페이지 열고 나서, 여자분들 댓글 많이 달리고, 뻘댓글에 항의도 하고, 그리고 공유하시는 분들 보면서, 제가 의도했든 아니든 이 페이지가 어느 정도 '토론의 장'이 되었다는 느낌 받았습니다. 제가 그 때 네이버 댓글에서 아 나도 댓글 달아볼까 느꼈듯이, 여혐에 대해 친구들과 조금은 공개된 공간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거죠. 사실 제 글이나 이런 주제가 새로운 건 전혀 아닌데, 여자분들은 보통 폐쇄된 여성 커뮤니티에서만 하던 얘기였습니다. 남자들이 끼어들 수 있는 자리에서는 아예 그냥 말 안 하고 넘어가는 그런 내용이요. 저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내놓고 부딪힐 수 있는 곳에서는 의견 개진 잘 안 하실 거에요. 전 (여혐스럽게도) 제가 여자라서, 소심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놀랐습니다. 지난 한두 달 보니까, 여성분들 댓글이 많으니까 여혐종자들이 댓글을 덜 달더라고요? 욕설은 거의 없고, 반대 의견도 덜 달리고요. "본진이라서 털린다", "양파 편들 많으니까 말 해보야 소용없다" 란 말이 보이더라고요. 아. 깨달음이 왔습니다. 내가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니구나. 얘네들도 욕먹는 거, 다른 사람들이 자기 비웃는 거 무서워하고 싫어하는구나. 이제까지 그 여혐 댓글 달고 난리 친 건, 세상이 다 지 편이고 다 지 맘 같다고 믿어서, 편해서 그랬던 거구나.     

제가 소유한 개인적인 블로그라기보단, 저와, 그리고 '나는 소심해'라고 생각했던 다른 분들의 체육관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조금씩 연습하는 거죠. 이건 아니다 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방법. 헛소리하는 사람에게 대들 수 있는 기회. 그렇게 아주 조금씩 간이 커지고 배짱이 생기고, 비슷하게 같이 싸우는 사람들 보면서 용기 더 얻습니다. 제 별거 아닌 글에 "좋아요" 한 번 누르는 것이 엄청 부담이신 분들 많은 거 알고 있습니다. 공유할 때마다 조심스럽게 변명하는 어린 친구들 보면 참 짠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저는 싫은 말 할 한국 페친 한 명도 없으나 그저 모르는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좀 들을 거 같아 망설였는데, 이 친구들은 공유 한 번, 좋아요 한 번이 훨씬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환경에 있거든요.     

이전에 성에 관한 글을 보셔서 아시겠듯이, 저는 한국 상황 잘 모르는 부분도 많습니다. 틀린 부분 지적해주시면 감사해합니다. 피드백 다 감사히 받습니다. 이전까지 공익적인 일은 하나도 못 하고 내 밥벌이 하나 챙기고 살아왔습니다만, 최근에 그런 생각 하고 있습니다. 그저 글 몇 개 쓰고 화젯거리를 만들고 그에 관해 토론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여혐러들이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포기 안 하고 계속 고나리질 함으로서, 그냥 그런 매개체로서의 존재만으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있다 믿고 있습니다. 겁도 훨씬 적어졌고요.     

작게 시작합시다. 여혐 관련 기사에 댓글 달고, 좋아요 하고, 공유하고, 그렇게 담을 좀 키워서 실제 남사친이 '김치녀' 어쩌고 하면 '너 그런 남자였어?' 한 마디 날려줄 수 있기까지 몇 달 몇 년이 걸릴지 몰라요. 직장의 성차별을 상대로 싸우는 건 그보다 훨씬 더 레벨업 해야 가능하겠지요. 선배 대항해서, 상사 대항해서, 부모나 시어른들을 대상으로 싸우는 것도 쌓아둔 내공 없이 쌩으로 덤비기엔 무립니다. 특히나 내 편 아닌 사회 분위기에서는요. 하지만 그 작은 행동도 도움이 됩니다. 당신에게서 '너 그런 식으로 여혐러로 찍히면 장가 못가'라고 말 한마디 들은 남자는 다음에는 아주 조금이라도 신경 쓸 거예요. 당신이 공유한 기사를 보고 '아니 이런 예쁜 여자도 여혐문제에 신경 쓰네? 여혐러로 찍히지 말아야겠다' 찔끔하는 페친이 한 명이라도 있을 거에요. 여직원들끼리 진상 개저씨 욕하는 거 듣고 조금이라도 몸을 더 사리는 상사가 있을 거에요.     


우리 그렇게 아주 조금씩 바꿔갑시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girl, but one giant step for all. 

소심한 당신의 작은 행동이지만, 그렇게 미시적인 행동들이 모여 사회를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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