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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Jun 13. 2018

왜 여자들은 사소한 걸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가

2017년 6월 29일

왜 여자들은 사소한 걸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가. 왜 '나도 귀하게 자랐다'를 말하는가. 

    

좋은 상상으로 시작하자. 당신은 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서울대 공대를 나왔다. 교수님들에게 이쁨받고 강력한 추천서를 받아서 미국 대학에 박사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쪽 연구소에서도 기대가 컸다.     

연구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미국인 대학원생들과 한국인 대학원생들의 행동이 다르다. 첫 만남인데 한국 학생이 커피를 타다 나른다. 그리고 "처음이니까 그냥 앉아서 커피 마셔. 하지만 정식으로 시작하면 네가 제일 후배니까 커피 타는 거다?" 라고 백인 교수님이 웃으며 말한다. "한국인들이 역시 그래서 좋아. 참 싹싹하고 교수님 모실 줄 알고 커피도 잘 탄단 말야! 그래서 내가 한국 학생들 많이 부르지! 미국 애들은 영 그런 서비스 정신이 없어."     

자, 이게 칭찬으로 들리는가? 한국의 민족성을 좋게 봐줬다고 느껴지는가?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아침에 교수님 책상 닦는 것, 커피 타 드리는 것, 손님 오시면 안내하는 것, 전화 받는 것 등등이 당신의 임무다. 선배들이 점심 사달라고 하면 점심 셔틀도 한다. 이거 다 더해봐야 사실 하루에 한 시간 이하다. 전화와 손님은 거의 오지 않는다. 하지만 혹시라도 오면 이것은 당신의 담당이다. 당신 다음으로 미국인 박사과정 학생이 들어왔지만 그 학생에게는 그런 일을 시키지 않는다. 왜? 미국인이니까. 그런 '서비스'는 한국 학생들이 잘 하니까.     


며느리들이 나도 귀하게 자란 딸이라는 거, 이런 일 하려고 시집온 거 아니라는 말이 이렇다. 커피 타는 것, 전화 받는 것, 뭐 그리 대단한 일 아니고 충분히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당신도 과학계의 미래 소리 들으며 학교 졸업했고, 희망 크게 가지고 유학 왔는데 무슨 황당한 '한국인은 그래'라는 억지 편견에 커피 및 점심 셔틀짓? 그리고 이걸 왜 내가 해야 하냐 의문을 제기하면 이번 한국학생은 잘못 뽑았느니, 특이한 애가 들어왔느니, 그거 뭐 힘들다고 좀 해주면 다들 좋은 걸 왜 일을 크게 만드냐는 소리를 듣게 된다. 다른 한국인 학생이 들어오면 떠넘길 수 있다는 말도 듣는다.     

'아니,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면 문제 해결이 아니라, 그리고 이 일이 힘들다 그게 아니라....!!' 라고 호소하면 존경하는 교수님과 선배님들을 위해 그 정도도 못 하냐, 근성이 없다는 소리 듣는다. 뭐 사실 그 정도 당연히 해 줄 수 있다. 같은 신참끼리 일을 나눠하는 거라면 특히나. 그런데 쟤는 미국인이라고 안 하고, 나는 '서비스 잘 하는 한국인'이고, 어차피 그거 생각하고 들여온 애니까 해야 한다니. 그리고 이런 관계도 제대로 관리 못해서 나중에 추천서는 어떻게 받고 취업은 어떻게 할 거냐는 협박까지.     

남편이라고 하지만 생판 남이다. 결혼했다 해도 남의 가족이다. 그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은 낯설다.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싹싹한 막내'가 되어서 애교를 떨고 어른들을 챙기고 부엌일을 도와야 한다. 그 집에 들어가는 새로운 식구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아닌가는 단 하나, 성별에 달렸다. 그 집 딸의 남편은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그 집 아들의 부인은 딱 찍힌다. 고추가 달렸냐 안 달렸냐로 취급이 갈라지는데, 이건 인종차별만큼이나 근거 없고 웃기다는 거, 그거 인정하면 참 좋을 텐데.     

아, 그리고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면 "난 미국 교수인데 한국 학생들에게 커피 부탁 안 함! 나 인간성 좀 좋은 것 같음" 방식으로 으스대는 인간들 꼭 있다. "난 가정적인데" "나는 여자 안 때리는데" "난 가사 부담하는데" 등과 같은 급의 말이다. 당연한 거 가지고 자랑하는 거 자체가 밑천 드러난 거다. 그걸 가지고 "어머 남자들 그러기 쉽지 않은데~" 라고 좋게좋게 우쭈쭈 해줘야 하는 상황이 웃긴 거고.     


 덧. 

당연한 말이지만 미국에 이런 대학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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