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Jun 17. 2018

노래 못하는 이의 행복

2017년 11월 28일

런던 떠나려니 생각나는 2010년 글.     




노래를 참 못 하는 내 음역은 1.3 옥타브이다. 여자 목소리치고는 아주 낮아서, 많이 안 올라가는 남자 가수의 노래를 그대로 부르면 되는 정도이다. 그러므로 내 최고 고음과 내 최고 저음의 차이는 보통 사람들의 반 정도인 셈이다.     

사실 감정 기복에 있어서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내가 느끼는 분노는 다른 이의 신경질이나 짜증, 내가 느끼는 터질 듯한 행복은 다른 이들의 적당한 만족감이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이오공감에 올라온 글 중에서 감정을 왜 제어하려 하느냐는 글이 있던데, 난 다른 이들처럼 좀 강하게 느껴봤으면 하고 자주 바라는 사람이라 그 글이 참 생경하게 다가왔다. 나의 감정 제어 시스템은 심히 효과적이셔서, 강하다 싶은 감정의 동요가 몇 분 이상 가는 일이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동요는 아주 편리한 기억 시스템이 자동 포맷처리를 해 준다.     


남아공을 떠나던 날 저녁, 공항 라운지에서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며 걱정했었다. 런던에 가서 불행해질지도 몰라. 취업을 못 할 수도 있고, 메이드가 없으니 집안일 하다가 스트레스로 확 돌아버릴 수도 있겠지. 물가도 비싸다는데 외식 못 해서 목매고 싶을지도. 어쩜 그렇게 매일매일 생활에 찌들면서 신랑하고도 사이가 벌어지지 않을까.     


오늘 저녁, 집에 오는 버스를 타면서 웃었다. 난 차멀미가 심해서 버스 타고 출근하라면 차라리 날 죽여라 했었을 인간이다. 그런데 요즘 아침저녁으로 4~50분씩 버스를 타고 있다. 맨 뒷좌석에 앉으면 멀미를 안 하게 되더라는 사실!!! 덕분에 지난 며칠 동안은 음악도 듣고 팟캐스트, 강의 등등을 들으면서 즐겁게 출퇴근하고 있다. 저녁 여섯 시면 마블 아치 사무실에서 나와 정말 맛있는 햄+치즈 크로와상을 파는 프렛을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가 버스를 탄다. 런던의 새빨간 이층 버스는 아무리 봐도 반갑다. 런던의 좁은 거리를 누비는 까만 택시 역시 마찬가지다. 예쁜 에마 왓슨 광고가 보이는 버버리 샵, 해로드와 나이트브리지를 지나 사우스 켄징턴의 예쁜 건물을 멍하니 바라본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은 하이드 파크를 가로질러 걸어갈 때도 있다.     

좁은 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조금 조잡스럽다 싶은 간판들, 그리고 그사이에 숨어 있는 우리 집. 나쁘지 않다. 아니, 영국식으로 not bad라고 하는 거지, 많이 행복하다. 이 나이에 하우스 쉐어를 하면서도 불행해지진 않았다. 남아공에 비해서 돈 씀씀이가 많이 줄었어도, 외식을 자주 하지 못해도, 멀리 출퇴근해도, 나의 효율적인 행복 엔진은 지금이 아주 행복하다고 보고한다. 

    

생각해 보면 십 년 전 월급 50만 원 받으면서 아침저녁 한 시간씩 운전하여 출근할 때도 비슷했다. 아침 여섯 시 이십 분이면 사무실에 출근해서 난 얼마나 행운아인가 감탄하곤 했다. 그 이후에 직장을 옮겨서도 그랬고, 신랑을 만나 결혼해서도 그랬다. 어느 상황이든지 난 미래에는 어떤 두려운 일이 일어날지 모르나 지금 당장은 내 생애에 최고 행복한 순간이라 믿는다. 이전에 행복했던 기억은 지금의 행복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 우긴다. 분명히 우울했던 날도 있었을 것이고 피하고 싶은 상황도 있었을 텐데, 내 인생은 전반적으로 행복했으며, 그래도 확실히 지금이 최고라고 굳게 믿는 이것은 아마 병의 일종이지 싶다.     

강한 감정은 잘 모른다. 다른 이는 그저 대체로 만족 정도로 표현하는 것을 나는 행복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행복하다. 겉은 시커멓지만 안은 무지하게 달았던 바나나를 먹어서 행복했고, 화장실 변기 옆에 주루룩 꽂아놓은 책을 보니 행복하고, 이빨을 닦다가 이번 주말엔 청소 좀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자 내 자신이 대견해져서 행복했다. 냉장고에 무가 아직 남아 있는 것도 행복하다. 오늘 오후 애프터눈 티를 모모 언니랑 먹으러 가는 바람에 저녁 여덟시까지 근무했지만, 하는 일이 어쩌다가 재밌는 일이었고, 늦게까지 일한다고 생색까지 냈으니 행복하기 짝이 없다. 물론 오늘 무지하게 큰 행복은 애프터눈 티 가서 배 터지게 잘 먹고 왔다는 것 -_-)v     

이럴 땐 단순한 게 복이지 싶다.     




그리고 8년이 지나고.     

아이 키우느라 시간 쪼들리고 돈 막 나가고 내 시간 없고 집안일 쉴 새 없이 몰아치면 어떻게 사나 했었는데 또 그냥저냥 산다. 이게 최고 행복이라 믿으면서. 인간의 행복 회로는 그래서 망상이 반일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의 말에는 컨텍스트가 있고 맥락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