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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Jun 18. 2018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한겨울의 크리스마스

2017년 12월 2일

거의 20년 동안 크리스마스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였다. 

남반구에서는 하지가 12월 22일. 

풀장 옆에서 고기 굽고 화채로 펀치 만들어서 수영하고 얘기하고 놀고 뭐 그런 분위기. 그래도 제목은 크리스마스다 보니까 쇼핑몰 등에서도 눈밭의 썰매, 산타 할아버지 장식을 하긴 하지만 영화에서 보아온 그런 한겨울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절대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 장식도 톤이 달랐다. 채도 높은 빨강과 녹색, 벽돌벽과 벽난로 불이 어울리는 그런 색깔이 아니라 좀 더 은빛, 차갑고 쿨한 빨강. 강한 아프리카 햇빛 아래에서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그런 색깔들.     


런던에 도착한 2009년엔 눈이 많이 내렸다. 그때까지는 패션 액세서리인줄만 알았던 목도리와 모자가 실제로 상당히 보온에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고, 솜으로 만든 가짜 장식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진짜 눈, 진짜 털부츠, 진짜 털모자 쓰고 다니니 아 이게 레알 오리지널 원조 크리스마스 느낌이구나 싶더라.     


이제 십 년이 가까이 지나고 나 역시 북반구의 겨울 크리스마스에 익숙해졌다. 11월정도 되면 글루바인 (멀드 와인, 뱅쇼) 냄새가 땡기기 시작한다. Spiced apple, 계피, 클로브, 크리스마스 푸딩 냄새가 여기저기에서 난다. 처음엔 되게 어감 이상하던 minced pie(보통 mince는 갈은 고기인데 이건 건포도 많이 들어간 파이)도 이젠 자연스럽게 카트에 넣는다. 메뉴도 많이 바뀐다. 드문드문하던 수프가 일주일에도 두세 개씩 메뉴에 올라간다. 걸쭉한 야채수프엔 갓 구운 마늘빵이 아주 좋다. 로스트도 잦아진다. 파스닙 로스트가 최애 아이템. 오늘은 (양고기 싫어하지만 배달 왔으니 -_-) 양고기 로스트. 저번 주는 돼지고기. 크리스마스 다가오면(좋아하지 않지만) 꼬마 양배추도.     


오늘은 겨울의 토요일 아침.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족의 전통...은 아니고 버릇 같은 게 생기긴 한다. 토요일 아침에는 내가 제일 먼저 깨서 주말 중 제일 부지런한 세 시간을 보낸다. 오늘 아침에는 야채 처리용 케일 수프랑 야채 로스트. 바나나 처리용 바나나 머핀 (이거 너무 자주 만드는 거 같지만 -_-). 양고기 로스트. 생선 처리용 피쉬케이크해서 크림치즈 처리용 머스터드/호스래디쉬 소스 범벅해서 애들 먹임. 민스파이 사다놓은 거 아니까 애들은 달라고 조르고, 케일 수프랑 피쉬케이크랑 로스트 한 조각 먹으면 준다고 으름장 놓아놓고는 이미 더블크림 꺼내고 있다 (...). 아님 커스터드. 아님 아이스크림. 살 안 찌는 옵션은 없군. 남편은 dad rock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Queen이 주로 많고 지금은 롤링 스톤즈의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 그나마 브루스 스프링스틴 이런 거 안 나와서 다행인가.     

음식하고 먹고 뒹굴뒹굴. 애들 옷은 아프리카에선 잘 안 입게 되던 진한 빨강과 녹색의 포실포실한 잠옷이다. 나는 안 입을 거라 다짐했던 기모+융 치렝스 꺼내 입었다. (추위 잘 타는 인간에게 하늘이 내리신 선물이다). 좀 치우고 또 뒹굴뒹굴. 오늘은 날씨도 좋은데 가까운 그리니치 공원이나 템즈 강변 가서 애들 좀 놀게 하고 나랑 남편은 핫초코나 먹을까.     

이제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가 어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가고. 나이를 먹고.     


- 그래도 기모 융 레깅스/치렝스는 영원하리라 

- 남편은 옆에서 감기가 이제 폐렴으로 업글 된 거 같다며 최대한 불쌍한 포즈로 소파에서 동글게 말고 콜록콜록하고 있음. 그래 니 엄살도 영원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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