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아파트의 보고에서 얻은 수수한 감상들
서울역 북쪽의 서소문 건널목―속칭 ‘서소문 땡땡거리’―은 간혹 ‘열리지 않는 건널목’이라고 불리곤 한다. 그 말인즉슨 시도 때도 없이 열차가 지나 다니니 차단기를 잠시라도 열어둘 수 없다는 의미이다. 차단기도 차단기지만, 땡―땡―하는 경보음 또한 쉴 새 없이 울리는 그런 건널목에서, 나는 옆 골목으로 피신(避身)하였다. 그곳에는 ‘서소문아파트’라는 이름의 아파트 한 동이 서 있었다. 이 아파트는 선형(扇形)으로 지어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 ‘욱천(旭川)’이 흘렀다. 지금은 ‘만초천’이라고 불리우는 이 하천은 대부분의 구간이 복개(覆蓋)되어 용산 전자상가 부근에서만 모습을 살짝 드러내며 ‘욱천 고가차도’라는 이름만을 남겨 놓았다.
서소문아파트 또한 이 하천 위에 세워졌다. 내가 걸은 이 아스팔트를 뜯어내지는 못 하겠지만, 맨홀 뚜껑이라도 연다면 그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복개부 위에서도, 위압감을 주는 마천루들 사이에서도 제 체면을 굴하지 않고 서 있는 이 아파트는 꽤나 용해 보였다. 나는 건널목 경보음에 도망치듯 이곳에 온 나를 생각해보았다. 당찬 서소문 아파트야! 나는 얼마나 작더냐―.
조금을 더 걸으니 충정로에 이르렀다. 가요 한 곡을 완창(完唱)하였을 즈음, 기차의 디젤 내음을 잊었을 즈음, 가솔린 내음이 나를 반겼으니 그곳이 충정로였다. ‘욱천’이라 불렸던 만초천마냥, 일제강점기 이곳은 죽첨정(竹添町)이라고 불렸다. 마포 종점으로 가는 경성 전차가 사대문을 벗어나 들어섰을 죽첨정. 물론 이제는 서울 지하철 5호선의 충정로역이다. 이곳에서는 특유의 녹색 외벽을 한 아파트가 눈에 띄었다.
아, 대한민국!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는 이 나라의 뭍에는 아파트가 서 있다. 권태(倦怠)로울 만치 아파트가 즐비하여 ‘아파트 공화국’이라고도 불리는 이 나라에서 ‘최초의 아파트’ 또한 퍽 흥미로운 타이틀 아니겠는가?
녹색 외벽을 한 이 아파트의 이름은 ‘충정아파트’―한국 최초의 아파트이다. 사실 ‘최초’라는 표현을 섣불리 쓰기에는 조금 조심스럽다.엄밀히 말해서 이 아파트가 최초의 아파트인지는 견해가 엇갈린다. 충정아파트보다 앞서 지어진 서울 중구 남산동1가의 ‘미쿠니아파트’를 아파트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쟁이 있다. 이 즈음부터는 심오한 학문적 논쟁의 영역이기에 내가 감히 접근할 자격이 없다.
이 나라가 아파트 공화국이니만큼, 나마저도 ‘아파트 키드’의 유년을 보냈다. 물론 내가 살던 아파트는 이 충정아파트보다 서너 갑절은 되어 보이는 것이 공장에서 찍어낸 듯 여러 동(棟) 서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것이 ‘아파트’였기에 충정아파트를 ‘최초의 아파트’라고 소개받았을 때에는 적잖이 신선하였다.
아흔 살이 넘은 이 건물은 산전수전 다 겪은 한 사람을 보는 것만 같다.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이 이곳을 점거하여 학살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서울 수복 후에는 미군에 접수되어 호텔로 쓰였단다. 이후에도 수차례 주인과 이름이 바뀐 것은 기본이요, 증축되기도 했는데 또 측면이 부분 철거되기도 하였으니 한 건물로써 많은 일을 겪었다. 팔을 벌려 포옹해보고자 하였다. 허나 사람 키에 비해 훨씬 크나큰 건물을 팔로 감쌀 수는 없었으니 손으로 찬찬히 벽면을 쓰다듬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충정아파트!”
통일로를 달렸다. 본래 이 길은 ‘의주로’로 불렸다. 즉, 서울과 의주를 오가는 길이다.
의주에서 서울로 올 때, 홍제(弘濟)는 서울의 관문이다. 이곳에서 무악재만 넘으면 비로소 서울에 당도하는 것이오니 이곳은 사람이 모이고, 재화가 모이고, 시장이 설 만한 곳이다. 그렇듯 이곳에도 ‘인왕시장’이라는 이름의 시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근방의 ‘인왕산’을 따온 이름을 보지 않으려 하기도 힘들다. 시장 이름마저 인왕시장이니 ‘인왕’이라는 말이 영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시장을 좋아한다. 시장은 흙에서의 농산물 내음을 맡으면서도 물에서의 수산물 내음을 맡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농업 내음과 동시에 어업 내음이 풍기는 곳이 있던가? 글쎄, 시장 밖에는 딱히 더 있을는지? 우리네 콧구멍이 두 개인 것은 이 반농반어(半農半漁)의 내음을 맡기 위함이로다.
헌데 나는 분명 시장을 둘러 보고 있었건만 어느새 아파트에 입성하였다. 그 안에 있으면 이곳이 시장인지 아파트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필시(必是) 시장과 아파트가 일체(一體)인 것이었다. 어느덧 아파트의 주거공간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꺾는 그 계단에서 나는 동서남북(東西南北) 중 어느 향(向)으로 걷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눈을 뜨고 걸었지만 눈을 감고 걷는 것과 같았다.
계단을 오르다 중정(中庭)을 맞딱뜨렸다. 일조(日照)의 기둥도 보였다. 이런 콘크리트의 우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조 말이다. 화초도 일조를 받으며 파릇파릇 자라 있었다.
화초의 녹음(綠陰)은 ‘콘크리트 권태(倦怠)’의 진통제이다. 이런 감상은 타이베이(臺北)에 갔을 때 창작하였다. 타이베이의 난지창(南機場)이라는 동리를 걸을 때 말이다. 그곳에서 철창에 얹혀 놓은 화초들을 보았다. 외장을 잘 가꾸지 않아 하나같이 잿빛의 ‘콘크리트 권태’를 보이던 대만의 건물들이었거늘, 화초들만으로 어찌나 ‘수수한’ 매력이 있던지! 나는 귀국해서도 이러한 ‘비밀정원’들을 눈 여겨 보았다.
춘하(春夏)에 동리 모처의 꼬마 연립주택 앞을 거닐 때도 나무에 핀 파릇파릇한 녹음은 여타 거대 정원 부러울 것 없었다. ‘원일아파트’라는 이 아파트 속을 헤매다 맞닥뜨린 이 일조의 중정 또한 거대 정원 부러울 것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다시 반농반어의 내음이었다. 원일아파트의 고요한 ‘비밀정원’은 온데 간데 없고 번잡한 시장이었다. 시가지―시가지란 이런 곳이다. 문 한 짝 사이로, 한 계단 사이로 시청각(視聽覺)이 급변하는, 그런 곳이란 말이다.
시장길 건너, ‘유진상가’는 그냥 짜장면이다. 홍제에 왔을 때 이곳에 들르지 않는 것은 중국집에서 단무지만 먹는 것과도 같다. 홍제에 조모(祖母)를 뵈러 왔을 때에도 조모를 졸라 유진상가를 걸어야 했다.
1층, 장노년층이 입고 다닐 법한 의류 코너에 젊은 청년이 웬일인지. 도로변의 농어업 내음과 달리 경공업(輕工業) 내음이 반기었다.
반면 ‘내부순환로’가 활공(滑空)하는 쪽은 적잖이 중공업(重工業) 내음이었다. 1999년, 이십일 세기를 앞두고 지어진 이 고가 도로는 유진상가의 반절도 썩둑 잘라 버린 대단한 친구이올시다―.
‘자연물’ 홍제천 위에 이십 세기에 들어 ‘인공물’ 유진상가가 비집고 들어섰다. 적잖은 대비 구조가 보이는 이곳이로다. 그런 이십 세기의 문명도 이십일 세기의 문명에게 유린(蹂躪)당하였다. 이십이 세기에는 또 어떤 유린이 있을는지!
물론 이 고가 도로가 그런 것 따위는 알 리 없으니 오늘도 교각과 상판, 그리고 자동차가 합주(合奏)하는 ‘내부순환로 환상곡(幻像曲)’이 홍제천의 졸졸 물소리를 덮어씌운다.
이 환상곡이 지겨워질 때 즈음 가좌(加佐)에 당도하였다. 역시나 상류의 인왕시장마냥 ‘모래내시장’이 들어서 있다. 그렇다면 나도 현명하게 ‘상가아파트’를 찾아보도록―.
가좌를 셀 수 없을 만큼 지나쳐 왔건만 이 ‘좌원상가’는 꿈에도 없었다. 기차를 좋아해서 건너편에 가좌역만 바라봤기 때문일는지?
앞서 본 아파트들과 달리 지대가 낮은 것이 한 몫 하는 듯하다. 1층인 것처럼 보이는 입구는 실은 1층이 아니요 2층이로다. 도로에서 잘 안 보이도록 웅크려 있는 것이다. 층고도 낮은 편이다. 낮은 천장에 매달린 간판이 내 머리를 건드릴 것만 같았다. 물론 내 키도 작은 편인지라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다행이로다.
좌원상가가 이렇게나 움츠려 있는 것은 딱하다. 왜? 그것은 세운상가니 낙원상가니 하는 ‘스타덤’ 상가아파트들에 비해 인지도에서 밀리는 까닭이다. ‘최초’의 타이틀은 그렇게나 주목받는다던데 최초의 상가아파트인 좌원상가는 어째 그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66년 준공된 이 건물이 흔히 ‘최초의 상가아파트’라 하는 세운상가보다 일 년을 앞선다는 사실을 다들 알았을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태껏 그 존재마저도 몰랐다. 그런 좌원상가는 영 남루했다.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이 상가아파트가 기를 펴지 못하고 움츠려 있으니 이것은 당연히 딱한 일이로다.
무정물(無情物)―아파트에 감정을 이입(移入)하는 것은 가소롭다. 허나 이러한 위트(wit)와 메타포(metaphor) 없이 공간을 산보(散步)하는 일은 너무나도 삭막한 일이로다. 나는 더 신선(新鮮)한 위트와 메타포를 창작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연남동’에로 향하였다.
글 철사
사진 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