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층처럼 묻힌 철거의 역사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거대한 습윤(濕潤)함이 옹포(擁抱)함을 느끼었다―대만 사람들은 ‘포옹(抱擁)’을 ‘옹포’라고 한다.
‘공항’은 ‘기장(機場)’, ‘지하철’은 ‘첩운(捷運)’이라 하는 이곳의 어휘는 적잖이 한자에 능한 이에게도 애로(隘路)일 것 같다. 내가 ‘첩운’이 곧 ‘지하철’임을 사전에 알고 온 일은 다행인 일이다.
첩운으로 가는 통로는 여행자들의 발소리와 캐리어 바퀴 소리뿐이었지만 무성(無聲)의 환대 가득이었다. 광고판의 문자들이 타이베이에 온 나를 환대하였지만 나는 그 문자들을 정확히 ‘독해’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이 생경한 어휘들이 이국적 정서를 환기할 뿐이었다. 승강장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공익광고의 씨엠(CM)송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 이곳은 한국이 아님만이 확실하였다.
동행한 B선생은 이십 세기 서울 지하철을 연상시키는 첩운 노선도가 정겹단다. 노선이 많지 않아 보기에 간결한 것이 이웃 섬나라의 수도보다 훨 낫다고들 하였다. 4호선까지였던 서울 지하철의 노선을 외우고 다니었다 하니 당신이 타이베이 시민이셨다면 첩운에도 통달(通達)하시었겠다고 나는 맞장구쳤다.
첩운이 들어왔다. 文湖線Wenhu Line을 나는 ‘원후’, B선생은 ‘문호’, S여사는 ‘웬후’라 읽었지만 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열차가 지상 고가로 나오자 우리는 감히 경관에 대한 ‘품평’을 하였다. 차창 너머로 본 타이베이의 건물들은 외관이 영 칙칙했다.
남경부흥(南京復興)역은 잊혀진 ‘중화민국(中華民國)’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몸은 대만에 있지만 마음만은 대륙에 있다는 장(蔣) 총통 각하의 영령(英靈)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아, 중화민국! 조각구름 대신 우중충한 비구름이 가득한 이 하늘 아래에서는 바다 건너 빼앗긴 성시(城市)들의 명자(名字)를 부르짖으며 야단들이었다.
충효부흥(忠孝復興)역도 적잖이 사상(思想) 내음이었다.
“儒家的傳統思想帶領我們的脚步
유가(儒家)의 전통사상이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네”
- 펑페이페이(鳳飛飛), ‘나는 중국인이다(我是中國人)’ 中
유가(儒家)의 전통사상이 발걸음을 이끈댔는데 이곳 환승 통로에서는 일제(日製) 명기(名機) 파나소닉(Panasonic)의 광고판에로 환승객들이 발걸음을 옮기었다. 똑같이 일제강점기를 겪었건만 이 나라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감이 적다.
‘철도부원구(鐵道部園區)’가 일찍 폐장한다 하니 곧장 그곳으로 가는 수 밖에―어려서부터 기차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나는 이곳에서도 철도 박물관에 가야 했다.
철도 박물관 앞에는 타이베이 부성(府城) 북문(北門)이 있다. 북문은 서울의 남대문 같은 것이라는데 영 초라하여 아쉬웠다.
삼개인(三個人)―삼 개의 사람이라는 이 구(句)는 사흘 동안 두고 두고 쓸 말이다. 교재에서 배운 회화들이 실제로 통하니 내심 뿌듯했다.
아해(兒孩)들이 많은 이곳에 다 큰 놈이 와 있으니 영 어색했지만 꽤나 전시의 수준이 높아 보였다. 이곳의 아해들도 어느 정도 자란 후에 다시 이곳에 와 보는 것도 좋을 걸요.
박물관에 가면 ‘디오라마’가 가장 맛있는 법이다. 이십 세기 타이베이역 주변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가 볼거리였다.
이십 세기의 타이베이는 지금과 많이 다르다. 나는 그곳에서 사라진 상가에 대한 간단한 렉처(lecture)를 하였다.
앞에서의 ‘북문’이 이 디오라마에 있다. 그곳에서부터 남쪽으로(사진에서는 오른쪽으로) ‘중화로(中華路)’가 넓고 곧게 뻗어 있다. 그냥 ‘중화로’는 생소하지만 시먼딩(西門町)을 관통하는 중화로는 덜 생소하다.
청대(淸代) 이곳에 성벽이 있었다. 북문으로부터 이어지는 이 성벽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는 철도와 도로(중화로)가 건설되었다. 교통을 가로막던 곳에 교통이 들어선 일은 조금 묘하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국부천대(國府遷臺)’ 이후 나 홀로 왔다. 대륙을 통치하던 중화민국 정부가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며 대만으로 퇴각한 일은 유명하다. 성벽을 헐고 놓은 철도와 중화로 변으로 무허가 판자촌들이 들어섰다.
1959년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이곳을 시찰하였다. ‘총통 각하’께서 보시기에 이 모습은 적잖이 누추하기 때문에 각계 각급 관료들이 총통의 지시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판자촌은 철거되고 철도와 중화로를 따라 여덟 개 동의 상가가 일렬로 들어섰다. 충(忠), 효(孝), 인(仁), 애(愛), 신(信), 의(義), 화(和), 평(平)―유교 사상의 핵심가치 팔덕(八德)이 각 동에 이름으로 붙여졌다. 또한 이들을 통틀어 ‘중화상가(中華商場)’라 일컬었다.
“1층, 협소하다. 물건으로 가득 찬 상점들. 2층 복도, 휴식 중인 사람, 옷을 말리는 이들, 사방팔방 뛰노는 아이들, 바쁜 걸음의 행인들 이 모두가 뒤섞여 있다. 오래된 가게와 새로 단장한 가게가 나란하다.”
- 왕즈훙, ‘저항의 도시, 타이베이를 걷다’ 中
눈으로는 신상 전자기기, 잡화 따위가, 그리고 유명 브랜드의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귀로는 북적이는 행인들의 목소리와 상점마다 트는 유행가들이, 코로는 소위 ‘맛집’들의 음식 내음이 들어오던 ‘핫 플레이스’ 중화상가. 허나 그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80년대, 타이베이의 상업 중심은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갔다. ‘도시의 종양’이라 불렸던 판자촌을 철거한 자리에 들어선 중화상가가 쇠퇴하며 또 ‘도시의 종양’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늘에서는 타이베이역을 오가는 기차를 볼 수 없다. 1989년 마무리된 타이베이 도심 철도 지하화 공사, 1999년 마무리된 첩운 공사와 맞물려 1992년 중화상가는 철거되었다. 중화로를 확장하고 ‘샹젤리제 거리’처럼 만들겠다는 황다저우(黃大洲) 당시 타이베이시장의 청사진 아래 이는 이루어졌다.
중화로를 따라 시먼딩으로 향하였다. 황혼이 짙은 ‘샹젤리제 드 타이페이’의 뭍에는 반복된 철거의 역사가 지층처럼 묻혀 있을 것이다.
주윤발(周潤發)이 육교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신문을 보던 시먼딩! 이제는 육교도 없고, 뒤로 보이던 상가와 철길도 없다. 그렇지만 ‘종양’이 떠나갔다고 지금의 시먼딩은 다시 불야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