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코]
쿠스코의 새벽 공기가 유난히 차갑던 날
장시간 버스에 앉아 쪽잠을 잔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잠을 자고 나면 피로가 풀려야 정상이지만, 오히려 피로가 쌓인 기분이었다. 기지개를 켜고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자 곧바로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 택시를 잡았다. 홉버스가 정차한 곳에 택시들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어서 택시를 잡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택시를 타고 숙소가 있는 중심지역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택시기사에게 숙소 주소를 보여줬지만, 그는 우리를 엉뚱한 곳에 데려다 주고서는 스페인어로 무슨 말을 하더니 금방 제 갈 길을 가버렸다. 아마 짐작해보건대, ‘여기서 내린 다음, 조금만 걸어가면 숙소를 찾을 수 있을거다’라고 말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주소를 알 수 있는 표지판은 없고, GPS를 켤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우리도 숙소의 위치가 어딘지 몰라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3분 정도 걷다 보니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굳게 닫힌 대문을 두드리고, 벨을 눌러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너무 이른 시각에 도착한 걸까?
하는 수 없이 일단 아르마스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광장의 새벽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낮이 되면 활기가 넘치는 이곳도 새벽에는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구나.. 은은한 불빛으로 거리를 물들인 가로등은 아름답기도 하면서 적막한 기운을 만들어 냈고, 광장을 떠도는 길고양이는 귀여웠다. 하지만 쿠스코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온갖 짐을 짊어진 채 쿠스코 거리를 배회하던 우리는 춥고 배고픈 상태였기에 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잠시 머무를 곳이 필요했다. 배도 채우고 와이파이도 사용할 겸 근처 샌드위치 가게로 이동했다.
닭고기 스프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뜨끈한 스프는 오갈 데 없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공원을 서성이던 우리의 속을 따스하게 달래 주었다. 샌드위치는 내용물이 실하게 들어 있어 허기를 달래기에 충분했다.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외국인 일행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고, 매장 내부는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은 주방과 가까운 구석 쪽에 위치해 있었고, 나는 매장 입구를 등진 채 앉아 있었는데, 나와 맞은 편에 앉아 있던 K와 B의 설명을 듣고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외국인 무리는 몽롱한 상태로 매장에 들어왔는데, 술에 취한 것인지 약에 취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제정신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들은 아르마스 광장 근처에 있는 클럽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해장할 겸 이곳에 들른 모양이었다. 혹시나 그들과 엮인다면 곤란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었기에 최대한 엮이지 않으려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오전 7시가 조금 넘어서야 마침내 호스트와 연락이 닿았고, 우리는 숙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무로 된 큰 대문을 밀고 들어가자 도어락이 설치된 현대식 문이 보였고, 그 안으로 안내데스크가 있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복층 호스텔 건물이었다. 호스텔은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중앙 정원을 지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 후 비좁은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우리가 묵을 방이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와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는 구조였지만, 2층에는 우리 말고 다른 투숙객들이 없어서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짐을 풀고 간단하게 세안을 마친 후 쌓인 피로를 풀 겸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쿠스코에서 여유로운 하루
알람도 맞추지 않고 푹 잤다. 눈을 떠보니 점심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 두 시. 내일 성스러운 계곡 투어를 하고, 마추픽추로 이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오늘 일정은 체력 회복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맥도날드에서 간단히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맥도날드로 터덜터덜 걸어 가는 길,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낀 채 흐리기만 했다. 어찌나 흐리던지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채로 밖으로 나왔다.
지난번 방문했던 기념품 상점 아순타(Asunta)로 가서 신중하게 판초와 바지, 모자 등 기념품을 골랐다. 원래 여행 왔으면 아낌없이 기념품을 사야 한다고 말하지만, 너무 많이 구매했다가 짐이 한 무더기 늘어나면 곤란할 수 있으니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신중하게 결정했다. 꼭 필요한 판초와 바지를 담고, 부피를 많이 차지하지 않는 작은 장신구 몇 개를 추가로 담았다. 가게 점원들은 이전에 방문했던 우리를 알아봤는지 작은 알파카 열쇠고리를 선물로 주었다. 딱히 쓸모는 없었지만, 선물을 챙겨주었다는 마음이 고마웠다. 각자 충분히 시간을 들여 쇼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다시 침대에 널브러졌다. 그러고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근처 마트로 가서 생필품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레스토랑에서의 근사한 저녁식사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던 이유는 모처럼 저녁식사를 근사하게 먹기 위함이었다. 바로 모레나(morena)라는 레스토랑에서 말이다. 이곳은 이미 네이버 블로그에서 쿠스코 맛집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었다. 단돈 1달러도 아껴 쓰는 여행자들이 무장 해제를 하도록 만드는 레스토랑이라니? 일종의 ‘나를 위한 선물’의 개념으로 우리도 레스토랑에서 호화롭게 먹어보기로 했다.
식당 입구부터 고급진 레스토랑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식당 안에는 제법 많은 웨이터들이 근무 중이었고, 우리는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배정받았다. 우리가 선택한 메뉴는 완탕면, 닭고기 파스타, 치킨스테이크, 토마토 스프와 과일주스. 메뉴를 주문한 뒤 매장을 둘러봤다. 나무로 만든 커다란 원형 테이블과 의자, 독특한 패턴으로 장식된 쿠션은 멋있으면서 편안하기까지 했다. 조약돌을 깎아 만들어 포크와 나이프의 거치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런 작은 부분에서도 주인장의 센스가 돋보였다. 접시들은 도자기 재질로 제작되어 깔끔하고 담백한 멋이 있었다. 바 테이블은 와인병과 와인잔으로 꾸민 인테리어가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매장 내부는 전반적으로 우든 계열로 꾸며서 아늑하고 모던한 분위기였다. 이미 음식이 나오기 전부터 블로거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음식과 음료가 나왔다. 음료는 병에 담겨 나왔는데, 병 입구에는 가니쉬로 올라간 과일이 꽂혀 있고, 병 몸통에는 꽃 장식을 둘러 멋스럽게 꾸며 놨다. 음식은 나무 도마에 올려진 채 제공되었다. 음식을 먹기도 전부터 이미 맛있는 느낌을 받았다. 예상대로 음식은 대체로 맛있는 편이었다. 음식의 맛도 훌륭했지만, 시각적인 면에서 디테일을 하나하나 신경 쓴 흔적이 엿보여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한 한 끼 식사였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우리보다 어리게 보이는 젊은 웨이터가 들뜬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자신이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기초 한국어 회화와 단어를 몇 개 알려주기도 했다. 누군가 우리나라의 문화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있어 하는 모습을 보이니 괜스레 뿌듯했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었다.
남미 물가를 고려한다면, 모레나에서 먹었던 음식들의 가격대가 훨씬 비싼 편이었지만, 이만한 퀄리티의 음식과 분위기라면 기꺼이 투자해도 아깝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음 여행을 준비했다.
오늘의 가계부
아침식사(닭고기 스프, 샌드위치) 40솔
맥도날드 79.5솔
맥도날드 아이스크림 8솔
MORENA 저녁식사 220솔